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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고은 성추행' 진실 판단…최영미 "정의 살아있어"

입력 2019.02.15. 15:35 수정 2019.02.15. 15:52 댓글 0개
고은, 성추행 폭로 허위라며 손배소 청구
법원 "최영미 진술 구체적·일관성 있다"
"고은 제시 증거는 허위 입증에 부족해"
박진성 시인 폭로 내용은 허위로 판결

【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성추행 의혹'을 받고 있는 고은(86·본명 고은태) 시인이 자신의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58) 시인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법원은 성추행 주장을 허위사실로 볼 수없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판사 이상윤)는 15일 고씨가 최씨와 언론사 등을 상대로 낸 10억7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시인 박진성(41)씨에 대해서만 1000만원 배상 판결로 인용하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최씨는 2017년 9월 계간지 '황해문화'에 '괴물'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시에는 'En선생'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내용이 담겼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등 표현이 동원됐고, 'En선생'은 고은 시인으로 해석됐다.

논란이 커가자 고씨는 지난해 3월 영국 가디언을 통해 "최근 의혹에서 내 이름이 거론된 데 대해 유감"이라며 성추행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파문이 확산되자 고씨는 한국작가회의 상임고문직 등에서 사퇴했고, 지난해 7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의 쟁점은 고씨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누워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내용과 2008년에 20대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내용이었다. 1992~1994년 사건은 한 언론사에 의해 보도됐고, 2008년 사건은 박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고En 시인의 추행에 대해 증언합니다'라는 글을 게재해 확산됐다.

재판 과정에서 양측의 주장은 크게 엇갈렸다. 고씨 측은 모두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허위 내용인데 제보가 돼 명예를 훼손했다며 주장했고, 최씨 등은 고씨 증언에 신빙성이 없으며 손해배상과 정정보도 책임도 없다고 맞섰다. 최씨는 변론기일마다 직접 출석하며 고씨와의 대질 신문을 주장했지만, 고씨는 건강상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고은 시인에 대한 미투 폭로 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한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8월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8.08.31. dahora83@newsis.com

재판부는 앞선 사건에 대해 "대법 판례에 따르면 특정 기간 어떤 장소에서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려면 위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허위 입증을 할 수 있다"며 "최씨 측은 소명자료로 최씨의 진술과 직접 목격했다는 진술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일기 등 몇 가지 정황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씨의 진술은 자신의 일기를 근거로 당시 있었던 고씨의 말 등을 묘사하는데 구체적이며 일관되고, 특별히 허위로 인식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반면 고씨의 반대 증거로 제시한 증언이나 주변 사정은 당시 사건이 허위임을 입증하는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2008년 사건에 대해서는 "박씨가 제보하고 보도되기도 했던 내용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박씨의 진술인데 박씨는 당시 제자라는 여성에 대해 특정하지 못하는 등 제보 내용이 허위내용이라고 인정된다"며 "제보 내용이 진실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되고, 고씨의 사회평가가 저하되면서 상당히 고통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박씨에 대한 1000만원의 위자료 청구를 인정했다.

다만 "고씨가 문인으로서 문예계에 미치는 영향이나 사안 성격을 보면 공공 이해에 관한 사항이고 공익을 위한 측면이 있다"면서 "언론사 측으로서는 제보 내용에 대해 나름 검토해보고 취재한 것으로 보여 사건 보도가 허위지만 배상책임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언론사에 대한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이 끝난 뒤 최씨는 취재진과 만나 결과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씨는 "이 땅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거다"며 "저는 진실을 말한 대가로 소송에 휘말렸는데 다시는 저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실을 은폐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은 반성하기 바란다.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뻔뻔스럽게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용인하면 안 된다"면서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문단의 원로들이 도와주지 않아 힘든 싸움이었지만, 용기를 내 제보해주고 증거자료를 모아 전달해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고 강조했다.

최씨를 대리한 한국여성변호사회는 판결 직후 "이번 사건은 성폭력 사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여성이 그에 관한 진실을 얘기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부터 소제기를 당해 2차 피해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가해자를 엄중히 꾸짖음과 동시에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음으로써 정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환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한편 고씨의 성추행 의혹 사건은 대표적인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사건 중 하나다. 법원에서는 미투의 상대방으로 지목된 이들에 대한 판단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지난 1일 항소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안태근 전 검사장은 지난달 23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윤택 전 예술감독도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고, 추가 폭로자들이 나오면서 별건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castlenin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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