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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은수저와 충분한 부모
입력 2016.01.13. 08:31 수정 2016.01.13. 08:37 댓글 0개서울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남기고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해 비탄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필자의 아이도 그만한 나이이기 때문에 청년의 사연은 필자에게 더욱 절절하고 가슴 아리게 마음을 벤다.
아마 청년은 다양한 상황에 대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경험하였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런 상황을 ‘학습된 무력감’이라 한다.
예를 들어 실험용 박스를 만들고 가운데에 장벽을 만든 뒤 한쪽에 개를 넣고 개가 있는 쪽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고 생각해 보자.
개는 자신이 머무르는 곳에서 전기 충격을 피하기 위해 가운데 장벽을 뛰어넘어 반대쪽으로 피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개가 피했던 쪽에 다시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실험용 개는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 넘어 그 전에 전기 충격이 가해졌던 쪽으로 다시 도망을 갈 것이다. 이런 절차를 몇 번 경험하면 그 개는 무력감을 학습하게 된다. 실험용 개에게 다시는 전기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무기력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 청년도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겪는 우울증도 생물학적 측면에 원인이 있는 경우가 있으나 학습된 무력감에 의한 경우도 많다.
우리 자녀들이 생활하는 가정, 학교 등 수 많은 공간에서 이런 이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자녀들의 생각과 의견을 들어보고 공감해주면서 아이들의 편이 되어 준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 자문해보자. 대개 우리 부모들의 의사소통방식은 거의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인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그는 자신을 힘들게 만든 것은 사회이고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에게도 행복한 경험이 있었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인생 자체가 엉망인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막스 베버의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학문의 목적은 정신적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희열을 느꼈으나 우리 사회의 구조상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전두엽 색깔이 아니라 수저의 색깔이라는 것에 좌절했다’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합리성, 즉 논리의 연산인 합리를 추구하였으나 이 세상의 합리는 논리적 결과와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느꼈었던 것이다.
요즈음 SNS에서는 자신의 꿈은 재벌 2세인데 아버지가 노력하지 않아 자신이 재벌 2세가 되지 못한다는 유머가 떠돌고 있다. 그만큼 경제적 불평등과 부의 양극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는 말일 것이다. 기회의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사회의 부조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놓고 싶은 많은 역경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필자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다 보면 칠십 혹은 팔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번개나 천둥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씩 맞아 보지 않은 분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일생 동안 일구어 온 사업체가 친구나 친지들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거덜 나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럴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을 하면 가장 많은 답은 “자녀들과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경쟁과 물질적 소유욕, 금수저나 은수저 혹은 흙수저로 계층화된 부의 세습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바람직한 삶의 태도와 자신을 일으켜 세울 줄 아는 힘을 스스로 기르게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최적의 발달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모들과의 상호작용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자녀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지 못한다면 자기 소멸로 갈 수 있는 파괴적인 내적 힘이 작동한다.
멜라니 클라인의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창조적 힘과 파괴적 힘 간의 강력하고 신비로운 내적 투쟁이다. 궁극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부모들과의 상호작용 경험은 자녀들이 경험하는 세계에서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자녀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에 영향을 끼치고 심리적 성장에도 영향을 끼친다.
부모들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한 기준도 없다. 완벽한 부모보다는 자녀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충분한 부모가 될 필요가 있다.
올 한 해에는 병든 부모가 건강한 자녀들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 <칼럼> 늘봄학교,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 '늘봄', 이 얼마나 예쁜 말인가? 봄처럼 포근하고 따사로움이 늘 함께한다는 뜻일 것 같은 '늘봄'. 그러나 이제 이 언어는 그렇게 쓰일 수가 없다.언어의 의미는 사회에서 규정된다. 아무리 좋은 언어라도 사회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언어의 오염이 시작되고 결국 그 언어는 이전의 의미로는 쓸 수 없게 된다. 나에게 '늘봄학교'은 '녹색성장'과 같이 그렇게 오염된 채 다가왔다.2024학년도 1학기 광주지역 늘봄학교, 신청에서부터 선정까지 학교 현장 갈등2월 현재 광주에서는 30여개 초등학교가 늘봄학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청한 18개 학교 중 중17개교는 협의록이 없으며, 교장 결정 3개교, 교장과 교감이 함께 결정한 학교 1개교,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결정한 학교 2개교, 부장교사가 요청하여 승인한 학교 1개교 등 내가 속한 학교지만 어떻게 늘봄이신청되고 선정되었는지를 학교 구성원은 잘 모른다.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속상해한다. 이렇게 늘봄학교는 불필요한 학교 현장 갈등을 양산 시키고 있다.교사? 돌봄전담사? 일반직?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어"우리가 일 때문에 늘봄학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늘봄학교 거부의 본질이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겠지만, 노동자에게는 일도 중요하다. 여전히 시간제가 많은 돌봄전담사의 업무도 아니고, 수업과 생활교육이 고유 업무이자 이것만으로도 과도한 노동을 하는 교사의 업무는 더더욱 아니다. 늘봄지원실을 만들어 일반직을 배정한다는 것도 총액인건비제에 묶여있는 공무원 상황을 보면 실현 가능하지 의문이 들고, 기간제에게 맡기는 것 또한 노동의 불안정성을 부추김과 동시에 결국은 기간제 공고부터 선정 관리까지 다시 학교의 업무가 되는 것은 학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학교의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 강요받은 업무를 그것도 과도하게 말이다.가장 중요한 사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는 '늘봄학교'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늘봄학교에는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초 늘봄학교에 대한 기사가 쏟아질 무렵 내 마음을 훅 치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기사 중에는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자녀로부터 들은 초등돌봄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엄마, 나는 초등학교 때 돌봄교실이 제일 싫었어. 다른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엄마랑 만나서 놀이터에서 놀고 학원에 가고 집에서 쉬는데, 난 혼자 돌봄교실에 갔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엄마랑 만나고 싶었어." 우리 아이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아침 7시부터 밤 8시까지 학교에 있는 게 폭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 안드는지? 어른들보고 그렇게 있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 집에 간다고 하지 않을까?늘봄학교에는 주체인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는 빠져있고, 즉 아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사유는 실종되었다.학교, 지자체, 무엇보다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돌볼 수 있도록필자도 아이를 돌봄교실에 보냈었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발을 동동거린 적이 있다. 대한민국 보호자들이라면 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두 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이 돌봄의 사회적책임이었고, 학교 현장에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돌봄의 사회적 책임은 보호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보호자의 양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노동시간 합의와 양육시간 확보도 해당될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저녁 있는 삶'과 같은 것이다.학교가, 지자체가 함께 우리 아이들을 돌봄과 동시에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돌볼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천천히 가더라도 그렇게 가야 우리 아이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있다.그렇게 간다면 다시 '늘봄', 이 언어의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 진정 우리가 바라는 '늘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애숙 광주동산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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