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적설량 0㎜

입력 2019.01.24. 16:46 수정 2019.01.24. 18:57 댓글 0개

인류학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에스키모인들이 사용하는 ‘눈(雪)’이라는 단어는 족히 스무가지가 넘는다. 사시사철 눈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 우리처럼 겨울에만 눈을 마주하는 사람들과는 눈을 대하는 자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에스키모 인들의 눈에 대한 단어를 들여다보면 눈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조금은 이해 할 듯하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가나’라고 한다. 쌓여 있는 눈은 ‘아풋’, 무더기로 쌓여 있으면 ‘기무 수룩’, 바람에 날리는 눈은 ‘피크 투룩’이라 부른다. 또한 눈보라 치는 눈은 ‘피크투룩 투크’, 그냥 내리는 눈은 ‘콰니크’라 한다니 눈의 종류가 이렇게 많나 싶다.

다분히 시적인 표현도 눈에 띈다. 늦가을 첫 눈은 ‘아필 라운’, 깊고 부드러운 눈은 ‘마우야’, 가볍고 부드러우면 ‘아쿨루 라크’, 설탕 같은 달콤한 눈은 ‘푸카크’다. 쌓인 모습이나 내리는 각도마다 눈에 대한 이름이 각자 다른 셈이다.

우리 나라 눈의 종류도 꽤 많다. 함박눈에서부터 시작해 싸락눈, 가루눈, 길눈, 도둑눈, 진눈깨비 등 10여종에 달한다. 그러나 올해는 함박꽃 같은 굵고 탐스러운 함박눈은 커녕 흔한 진눈깨비 조차 코 빼기도 안 비친다. 올해 현재까지 광주시 적설량은 0㎜. 올 겨울 단 한차례도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 적설량이라 할 것도 없다. 1월에 눈이 쌓이지 않은 해는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광주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 “무등산 정상에 눈이 세번 내려야 광주 읍내에 눈이 온다”. 올들어 무등산에 몇 차례 눈이 내렸지만 도심에는 눈이 사라지고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 먼지만 기승을 부리고 있다.

광주 기상청은 올해 눈이 사라진 이유를 동아시아 부근 상층에 떠 있는 공기의 ‘블로킹 현상’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따뜻한 공기 덩어리가 동서로 넓게 퍼져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 오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철 광주·전남의 눈은 북쪽의 찬공기가 내려와 따뜻한 서남해안 바닷물과 어우러져 전남 서해안에 눈을 뿌리고 나머지는 내륙에도 내리는 구조다. 그런데 올해는 찬공기와 바닷물의 만남 자체가 없으니 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1월말까지 이런 현상이 이어진다니 올 겨울 눈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기상청 설명이야 그렇다해도 참 낭만 없는 겨울이다. 겨울하면 눈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올 겨울 눈이 사라지고 미세먼지만 잔득 쌓이니 감성이 메마른 느낌이다. 밤사이 누구도 모르게 내리는 ‘도둑 눈’이라도 좀 봤으면 한다. 겨울철 흔하디 흔한 눈이 사라진 뒤에야 정작 소중함을 알 것 같다. 그나 저나 첫 눈 오는날 데이트 약속한 젊은 친구들은 어떡해야 하나. 그들을 위해서라도 0㎜ 적설량은 깨져야 한다. 눈이 사라진 것도 혹시 미세 먼지 탓은 아닐까. 나윤수 컬럼니스트nys 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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