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일용직 근로자들 모두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길”

입력 2019.01.21. 16:25 수정 2019.01.21. 16:28 댓글 0개
2019년을 여는 사람들-일용직 근로자 김춘배씨
비수기로 한달 절반 밖에 일 못하지만 일할 수 있어 행복
전대 병원에 시신기증 서약… 도미한 딸 가족 만나고파
지난 20일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김춘배(76)씨가 근로자대기소에서 건설 현장에 나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20일 새벽 4시 40분 북구 우치로 ‘광주 인력사무소’의 불이 밝혀지자 일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난로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자판기 커피 한잔씩이 들려 있다. 이들 사이에는 가장 연장자지만 유독 유쾌하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한 김춘배(76)씨도 있었다.

김씨는 나이가 많아 공사 현장 막노동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막노동을 하지만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도 않고, 손주들 용돈도 주면서 할아버지 노릇도 할 수 있어서 좋다”며 “운동한다는 생각으로 긍정적으로 일을 하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없다”고 웃음 지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나에게 일거리가 주어지고 일터에 나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막노동은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업종이지만 젊은 사람들과 한 팀으로 일할 수 있어 즐겁다”며 “나이든 사람은 생각이 박혀서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데 젊은이들은 무한한 상상력이 있어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즐겁다”고 강조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매일 새벽 인력사무소를 찾는 사람들로 붐비지만 매일 일을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씨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다’지만 일용직은 일찍 나온다고 다 일을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며 “이곳에 나와 3시간 동안 기다리다 그냥 돌아가야하는 경우도 많다. 나야 나이가 많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젊은 사람들도 형편은 비슷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나보다 돈이 더 많이 필요한 젊은 사람들이 일을 나가지 못할 때 더 안타깝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도 토요일, 일요일 할 것 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달 꼬박 나오지만 많아야 15일 정도밖에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달에도 16일, 11월에도 14일 정도만 현장으로 불려 나갔다. 날씨가 추운 겨울은 건설 현장이 비수기라서 더욱 일거리가 없어 허탕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은 늙었다는 생각을 못할 정도로 지병도 없고 몸도 건강해 활동적이만 많은 나이때문에 건설현장에서 그에게 일을 맡기기 망설이는게 느껴져 아쉽다.

김춘배씨의 시신기증등록증

김 씨는 “건설 현장에서 나이든 사람을 잘 받아주지 않아 노인들을 받아줄 수 있는 곳을 가야하지 않을까”라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공사 현장은 늘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대형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김 씨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김씨는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자신의 왼손을 보여주었다. 10여년 전 공사 현장에서 다친 흔적이다.

김 씨는 “예전보다 업무 환경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일이다. 얼마 전 오룡동 일용직 추락사고 이야기를 듣고 아찔했었다”며 “3D업종이지만 보다 안전하게 근무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어 “힘이 되는 날까지 다치지 않고 열심히 현장에서 일하다 온전히 죽어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몸이 쓰이길 바란다”며 시신기증등록증도 꺼내보였다.

김씨는 지금, 비록 막노동을 하는 70대 노인이지만 한국 산업 발전의 ‘산증인’이다. 1960년대 전자제품의 기초가 되는 인쇄회로기판(PCB)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상용화시키는 등 한국의 전자산업의 초석을 세우기도 했고, 국가적 산업 과제를 맡은 사업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엔지니어로서 능력은 있었지만 사업은 그것과는 별개더라”며 그의 굴곡진 인생을 에둘러 보여주었다.

김씨는 “늙어가면서 큰 욕심은 사라지고 작은 소망 한두개만 있을 뿐이다”며 “하나는 자신과 가족들이 아프지 않기를, 또 하나는 미국으로 이민가 15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을 보는 것이다”고 말했다.

쉽게 오가지 못한 탓에 한 해 두 해 만나지 못하다 보니 어느 새 15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김씨는 “올 해는 딸아이와 손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기대했다.

김씨는 자신보다 오히려 나라에 대한 걱정과 욕심이 더 크다. 그는 “올 해 최고로 바라는 점은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것”며 “최근 집값이 많이 올라 특히 젊은 사람들이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게 안타깝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집을 재산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 아닌 거주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으면 한다”면서도 정부에는 “정부가 희생해서 사람들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집값을 안정시켜 달라”고 주문했다.

이영주기자 lyj2578@srb.co.kr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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