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은퇴 크레바스

입력 2019.01.10. 19:31 수정 2019.01.10. 19:39 댓글 0개

크레 바스는 빙하에 난 균열을 말한다. 한번 빠지면 천길 낭떠러지여서 좀처럼 빠져 나올수 없다.

명주 잠자리 애벌레인 개미 귀신은 모래밭에 크레바스를 판다. 동그랗게 홈을 파 깔때기 모양의 함정을 만든다. 개미 귀신의 깔때기 모양 함정은 개미에게는 치명적 크레바스다. 보통 5㎝ 깊이지만 개미가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한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바닥으로 미끄러지게 설계 된 때문이다. 개미 귀신은 함정에 빠진 개미를 향해 모래를 쏟아 부어 정신 줄을 놓게 하는 심리전도 펼친다.

개미 귀신의 건축 실력은 정평이 나있다. 개미가 미끄러져 내릴 비탈각을 본능적으로 계산하는 신묘한 건축술을 지녔다. 더 섬뜩한 것은 신체 구조다. 일단 몸색이 모래를 닮아 구별이 어렵고 1㎝ 정도의 작은 몸에 납작한 사각 모양 머리, 낫 모양의 강력한 턱으로 무장했다. 굴속에 며칠이고 끈기 있게 버티는 지구력도 탁월하다. 재수 없는 개미가 일단 함정에 빠져 들어오면 강력한 턱으로 문 뒤 신체 내용물만 빨아 먹고 사체는 모래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개미 귀신은 항문이 없는 기이한 절지동물이다. 수백 마리의 개미를 잡아먹고도 배설물은 계속 모아 뒀다가 번데기 시기에 이를 쏟아낸다. 개미귀신이 성충인 명주 잠자리가 되기까지 보통 2~3년이 걸린다. 그때까지 수백 마리의 개미를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개미 귀신형 인간이 수두룩 하다. 이른바 베이버 부머 (1955년~1963년생)세대의 은퇴가 본격화 되면서 이들을 노리는 ‘개미 귀신형’ 인간들이 진을 치고 크레바스를 파놓고 대기 중이다. 현재 우리나라 베이비 부머 세대 인구는 720만명 정도로 인구 구조상 가장 두텁게 형성돼 있다.

2020년까지 700여만명의 은퇴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청춘을 바쳐 모아온 퇴직금 등 은퇴자금을 노리는 개미귀신형 인간이 진을 치고 있어서다. 이들은 온갖 달콤한 말로 퇴직자를 유혹하다 한순간에 낚아채 피같은 은퇴 자금을 빼앗아 배를 채운다.

그렇게 은퇴 크레바스에 빠져 허우적 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사회는 퇴직 베이비 부머에 대한 위험 경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각자 도생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베이비 부머 세대에게 그럴듯한 인생 3모작 같은 이야기는 책에나 존재 하는 세계다. 피자·치킨·커피로 대변되는 생계형 자영업자 이른바 ‘피친커’는 몰락 중이고 전체 베이비 부머 20%는 연금 한 푼 없이 부초 처럼 떠돈다. 거기다 속절없이 크레바스에 빠지고 만다. 연금을 받는다 해도 월평균 45만원에 불과한 은퇴 크레바스를 헤쳐 나가야 하는 베이비 부머 삶이 위태롭기만 하다.

나윤수 컬럼니스트 nys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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