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학부모’ 말고 ‘부모’가 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입력 2019.01.07. 15:51 수정 2019.01.07. 15:58 댓글 0개
김지선 교단칼럼 각화중학교 교사

새해가 밝았다. 2018년 새해 첫 날 백아산에 올라 새해 첫 일출을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9년 1월에서도 1주일이 지났다. 혹자는 나이에 따른 시간의 체감 속도를 10대엔 10km, 20대엔 20km, … 70대엔 70km의 속도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는데 적절한 비유인 것 같아 고개를 몇 번 씩이나 끄덕였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것이 조바심이 날 정도였는데, 지금은 내가 의도하지 않게 과속하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아닌지, 삶을 너무 단조롭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때는 내가 한 살 더 나이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부끄럽기도 하다. 이런저런 걱정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새해에 대한 흥분된 마음,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매년 이 맘 때쯤 찾아오는 습관성 질병인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복잡한 마음으로 2019년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즐겨듣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님의 인터뷰를 듣게 되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채현국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다. 채 선생님은 올해 연세가 85세셨지만, 카랑카랑하고 기백 있는 음성과 젊은 사람보다 더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면을 갖추신 분이셨다.

선생님의 연보를 정리해 보면, 1935년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중앙방송(현 KBS) PD로 입사했으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권력의 나팔수로 살기 싫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다.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10위권에 들 정도로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10월 유신 이후 선생님은 권력과 얽혀 앞잡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사업을 정리하고 자유인으로 돌아간다.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들에게 자신의 집과 회사를 은신처로 제공하고,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효암고등학교와 개운중학교를 거느린 학교법인 효암학원의 이사장으로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월급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85세지만 아직도 ‘철따구니가 없다’시며 초반부터 청취자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배우를 지망했기에 철학과를 간 것이며, 방송 검열로 3개월 만에 PD를 그만둔 사연, 밥은 두 그릇 이상을 먹으면 맛이 없는데 돈은 벌면 벌수록 마약처럼 중독돼 결국은 돈에 미쳐가는 것 같아 잘 나가던 탄광사업을 정리한 이야기 등 예사롭지 않은 선생님의 일대기에 푹 빠져 버렸다.

그러면서 가슴을 뛰게 하는 주옥같은 말씀들을 들려 주셨다.

“늙으면 뻔뻔해져요. 우리 모두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 나도 이런 데 나와서 옳은 소리 할 째비가 안 되는데, 일제 강점기부터 살아남으려고 비열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해방이 되고 5년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고 그 꼴로 살아남았던 것 자체가 부끄럽게 나이를 먹은 겁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어요. 해답이 있을 뿐이지, 정답이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죠.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때그때의 해답이 있을 뿐이지 정답이라는 발상은 아주 잘못된 발상이죠. 그게 독재가 만들어낸 사고방식이에요.”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고 배우는 학교가 되어야 해요. 배우고 싶게끔 해야 해요. 자꾸 가르치면 안 되죠. 세뇌한다는 소리밖에 더 됩니까? 정말로 우리네는 희한하게도 학교를 오래 다니거나 높은 학교까지 다닐수록 뻔뻔하고 염치없어지는 현상을 봅니다. 왜 학교가 그 꼴일까요? 경쟁만 시키니까 그렇게 되죠. 기본적으로 뭘 배우고 함께 사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르치려고 달려들면 경쟁부터 시켜요.”

“학부모가 되지 말고 그냥 부모님들이 되시면 됩니다. 자기 자녀한테 그런 이상한 경쟁에 좋은 학교 가서 좋은 직장에 간다라는 그런 망상을 자꾸 심어주면 안 돼요. 자식은 정말 부모 마음에 들게 살고 싶습니다. 그거 믿어주면 됩니다.”

인터뷰 내내 문익환 목사님도, 리영희 교수님도, 신영복 교수님도 없는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진정한 스승이 없다고 개탄했던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꼿꼿하게, 선명하면서도 서늘하게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는 존경스런 어르신이 있음에 감사한 새해의 시작이었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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