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이 겨울, 에디뜨의 장밋빛 인생을

입력 2018.12.14. 10:01 수정 2018.12.14. 11:11 댓글 0개
김세경의 월드뮤직- 에디뜨 삐아쁘
리즈 시절의 에디트 파이프

“나는 배고팠다.

“나는 추웠다. 그러나 나는 또 역시 자유로웠다. 아침에 안 일어나도 되고 밤에 자러 가지 않아도 되고 그 시절 나는 맘껏 취했고, 꿈꿨고, 희망했다.” 에디뜨 피아프의 독백 중에서

1963년 10월 10일 가련한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죽을 때 그녀의 몸무게 33킬로.

“사랑의 찬가”, “장미빛 인생”, “저는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요”. 같은 히트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우리의 에디뜨 피아프! 그녀는 자동차 사고 네 번, 자살 미수 한번, 마약 치료를 위한 입원 치료 네 번에, 발작, 알코올과 약물 중독과 폐렴, 그리고 위궤양, 간암으로 평생을 숨가쁜 힘 겨루기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 나이 마흔 일곱, 그 아까운 인생을 마쳤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전체 교통이 이때처럼 마비된 적이 없었다. 십 만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녀의 인생이 방종했다고 카톨릭 교회는 그녀의 장례 미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 1915년 크리스마스가 되기 7일전, 벨레빌 72번가 도로에서 태어난 에디뜨 피아프는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었다고. 에디뜨는 프랑스 샹송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도 위대한 가수가 되었다.

에디뜨 피아쁘는 에디뜨 지오바나 가씨옹으로 1915년 12월 19일 벨르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곡예사였고 어머니 역시 삼류 가수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던 길거리 가수였다.

부모가 둘 다 에디뜨에 대한 양육 의지가 없었고 그녀는 창녀촌을 운영하던 친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일하는 직업여성들이 번갈아 가며 에디뜨를 키웠다.

에디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남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려서 자기가 자라났던 곳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남자들이 부르면 여자는 절대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인식 같은 것이 자신에게 생겨났다”고 말이다. 에디뜨의 남성 편력의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부분인 셈이다.

게다가 에디뜨는 세 살부터 일곱 살 때까지 각막염의 부작용으로 거의 실명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이 회복이 되는데 에디뜨는 이를 보고 테레사 성녀의 은총 덕분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참으로 가여웠다는 생각이 든다.

에디뜨의 나이 열네살에 그녀는 대중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했다. 아버지의 거리 공연에 함께 하게 되면서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녀의 이복 여동생 시몽 베르토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에디뜨 피아쁘와 시몽 베르토

1932년 그녀 나이 열 일곱, 루이스 뒤퐁이라는 남자를 만나 짧은 시간에 사랑에 빠진다. 시몽과 에디뜨는 작은 아파트를 구해 함께 살았는데 후에 루이스까지 셋이 함께 살게 된다.

시몽과 루이스는 극도로 서로를 싫어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루이스는 에디뜨가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노래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일을 그만두라는 그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에디뜨는 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됐고 잠시 화환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에디뜨는 딸을 낳았다. 에디뜨 역시 어렸고, 보호 받지 못한 삶을 살아서였을까 그녀 역시도 어떻게 딸을 키워야 할 지, 사랑해줘야 할지 난감해 했다.

처음에는 딸을 키워보려 했지만 힘들어 했고 후에 루이스가 헤어진 에디뜨 마음을 돌려보려 딸을 데리고 떠난다. 하지만 에디뜨는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보육원비를 대주기 위해 밤낮으로 노래 부르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이런 에디뜨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의 딸은 두 살 때 뇌수막염으로 죽는다. 들리는 애기에 의하면 에디뜨가 자신의 아이 장례 비용을 위해 몸을 팔았다는 애기도 전해진다.

1935년, 파리의 피갈 지역의 나이트 클럽 사장이었던 루이스 르플레에 의해 캬바레 가수로 발탁된다.

그는 키가 142센티로 아주 작고 왜소했던 에디뜨 피아프에게 처음으로 무대 이름을 모메 피아프라고 지어준 장본인이다. 작은 참새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시그니처가 될 만한 의상으로 까만 드레스를 입어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에디뜨는 까만 드레스와 힐을 신은 작은 체구의 거인으로 전 세계 팬들의 기억 속에 각인 되었다.

르플레는 유명인사들을 많이 참석시켜 성대한 오프닝 쇼를 기획했고 에디뜨를 포함해 모리스 슈발리에, 장고 라인하르츠, 노베르 글란츠베르그등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된다. 에디뜨는 같은 해 두개의 앨범을 발표하고 그녀 평생 가장 아꼈던 작곡가 마르게리뜨 모노를 만나게 된다.

무대위의 에디뜨 피아프

1936년 루이스 르플레가 에디뜨 피아프와 과거에 연관이 있었던 폭력배에게 살해 당하면서 에디뜨 피아프도 구금 당해 취조를 받는다.

이 일로 에디뜨의 이미지가 땅 바닥에 추락하게 된다. 이미지 쇄신을 위해 고용된 레이몽 아소는 이름을 모메 피아프에서 에디뜨 피아프로 바꿀 것을 제안하게 되는데 원래 에디뜨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벨기에 병사의 탈출을 도운 에디뜨 카벨이라는 간호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 간호사는 에디뜨 피아프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처형되었다.

1940년 에디뜨는 장콕도와 함께 ‘냉담한 미남’이라는 연극을 함께 하게 되는데 이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사회의 유명인사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44년에는 가수 이브 몽땅과 염문설이 터진다. 47년 이브 몽땅이 에디뜨 피아프와 거의 동급으로 유명해지자 그 둘은 헤어진다.

에디뜨 피아프와 이브 몽땅

에디뜨 피아프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자 파리에서 가장 성공한 가수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전쟁 이후에는 전 세계적인 명성을 쌓으면서 유럽과 미국, 남미로 콘서트 투어를 다녔다. 아르헨티나 뮤지션인 유빵기의 데뷔를 도왔고 샤를르 아즈나부르의 초기 경력을 쌓는 것도 도와준다.

처음에 미국 콘서트를 했을 때 미국 팬들의 냉담함에 엄청 실망했지만 후에 그녀의 명성이 더해졌고 결국 에디뜨 피아프는 에드 설리번 쇼에 여덟 번이나 출연하고 카네기 홀에도 두 번에나 서게 된다.

에디뜨 피아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게슈타포와 나치 파티, 독일군들 앞에서 공연을 했고 그들의 활동을 지지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녀를 놓고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 되었다. 한동안은 엄청난 비난 여론에 시달려야 했다.

후에 에디뜨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은 에디뜨가 프랑스 레지스탕스 일원들을 비밀리에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 의식 고취 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유태인 친구, 마이클 에머와 그의 동료들이 처형 당하지 않도록 탈출을 도왔고 경제적으로 그들을 돕기까지 했던 사실이 밝혀지며 그녀에 대한 혐의가 벗겨진다.

“에디뜨의 마법은 그녀의 레파토리가 관객 모두를 감동 시킨다는데 있다.” 고 가디언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던 에디뜨 피아프 탄생 100주년 특집을 진행했던 큐레이터가 말했다.

그녀는 심플한 노래를 사랑스런 멜로디로 노래하는데 이는 마치 사람들에게 그네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 노래를 듣고 가슴이 찡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에디뜨는 여자로써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사랑하는 이를 비행기 사고로 보내야 했다. 돌아오면 결혼하자고 다짐했고 그녀가 일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복서 마르셀 세르당은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그녀에게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다. 그 소식을 건네 받은 날에도 그녀는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참고 무대에 섰다. 그리고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 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단지 사랑하기만 하는 거죠. 왜냐하면 그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것이니까요. 바로 그렇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답니다.” 에디뜨 피아프의 장미빛 인생 중에서

그녀가 죽고 50년이 흐른 후 장례 미사를 거부했던 카톨릭 교회는 에디뜨가 태어났던 벨레빌의 한 교회에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 미사를 집전했다.

에디뜨 피아프는 더 이상 타락한 요부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 받는 샹송 가수였음을 교회 역시 인정한 셈이다. 다가오는 12월 19일는 그녀가 태어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만큼은 자신의 인생은 가련했으나 그녀의 음악은 결코 가련하지 않았던 우리의 작은 거인, 에디뜨 피아프를 맘껏 기리며 그녀의 장미빛 인생을 들어보자, 그리고 외치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김세경

김세경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회의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문화강의 교수로 활동했다. 월드뮤직 애호가이자 전문가로 지역방송에서 대중에게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호주에서 아트앤 인테리어 데코레이션 공부를 한후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신진작가들과 외국인 화가들을 후원하는 전시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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