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피해자에 관한 통념 뛰어넘은 증언문학 보고

입력 2018.12.14. 10:00 수정 2018.12.14. 10:16 댓글 0개

삶은 계속된다
루트 클뤼거/ 최성만 옮김/ 문학동네/ 1만5천

삶은 계속된다

“죽음이, 섹스가 아니라 죽음이, 어른들이 숙덕거린 비밀,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귀기울인 비밀이었다.”

중략

“모든 걸 알아내는 우리는 가스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이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올랐고 그래서 남자들 시체는 늘 위에, 아이들 시체는 맨 아래에 있었다. 아버지는 숨이 끊어질 때 나 같은 아이들을 짓밟고 있었을까?”

루트 클뤼거의 ‘삶은 계속된다“의 첫 문장은 어른들의 음습한 비밀을 들으려는 10대 소녀의 숨죽인 귀 기울임으로 시작한다.

‘어느 유대인 소녀의 홀로코스트 기억’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클뤼거의 대표으로 기념비적 증언문학으로 꼽힌다.

나치가 지배한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을 유대인 어린아이, 딸, 여성, 문학 독자의 관점에서 기록한 이 책은 강제수용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폭력이 지금과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1992년 독일 출간 당시 강제수용소의 참담함을 재현한 또 하나의 수기가 아닌, ‘피해자에 관한 통념을 매 순간 배반하는. 페미니즘적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 독보적인 홀로코스트문학’이라는 평가와 함께 독일어권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작품에는 ‘마지막 생존자라는 수식어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역사의 증인, 홀로코스트 추모문화를 거부한 홀로코스트문학,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증언문학’이란 찬사가 더해졌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고 한참 뒤 ‘가해자의 언어’를 다시 꺼내 쓴 독일문학연구가 루트 클뤼거는 날카롭고 간명하고 유려한 문체로 독자에게 에두름 없이 말을 건다는 평을 들었다.

이 책은 국가폭력 피해자(특히 여성)의 경험과 기억, 사후 영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증언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날카로운 문장과 기억을 불러내는 기법 등 탁월한 문학성을 인정받아 토마스만 문학상, 레싱 문학상, 쇼아 기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0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는데 당시 189만 명의 도시 인구 중 10만 독자가 이 책을 읽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루트 클뤼거는 193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공장장의 딸을 어머니로 둔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열한 살 때 고향에서 추방돼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945년 2월 ‘죽음의 행군’ 도중 탈출해 살아남았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독문학을 공부해 독문학 교수가 됐다.

그 밖의 저서로 ‘여성은 다르게 읽는다’ ‘파국들. 독일문학에 대하여’ ‘시인과 역사가. 사실과 허구’ ‘길을 잃다’ ‘여성이 쓰는 것’ ‘역풍. 시와 해석’ 등이 있다.

김옥경기자 okkim@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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