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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열쇠, 대화와 토론
입력 2018.11.27. 19:10 수정 2018.12.04. 11:49 댓글 0개풍요롭고 찬란했던 가을이 짧게 지나가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쌀쌀해진 날씨와 더불어 반갑지 않은 손님, 미세먼지가 가끔씩 찾아와 숨쉬기도 힘든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그런데 미세먼지보다 더 답답하고 건강하지 못한 기운들이 점점 우리 사회를 잠식해 나가는 것 같다. 바로 '혐오'라는 극단적 사회 분위기다.
최근에는 이른 바 '이수역 폭행사건'으로 인해 '여혐'(여성혐오), '남혐'(남성혐오)이라는 단어가 이슈가 되고 있다. 이렇게 성별에 대한 혐오 외에도 나와 다른 지역, 국가, 인종, 종교, 성적 취향, 신체적 특징을 이유로 멸시와 비하의 표현들이 넘쳐나고 있다. 맘충, 김치녀, 메갈, 한남(성별), 쿵쾅이(신체), 홍어(지역), 틀딱충, 할매미(연령)' 등.
이렇듯 혐오의 언어는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유튜브에서 교실로, 보수집단의 선동적 언어에서 정치인의 입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특히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최근에는 난민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는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17년 11월 10일자 경향신문에서 사회학자 오찬호는 혐오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신자유주의 이후 경기불황으로 나빠진 삶,
좌절과 불안은 일상이고 안정되고 행복한 삶은 요원하다. (중략) 죽도록 '노오력'을 해야 정규직이 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사회적 약자들은 생떼를 쓰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분노는 강자를 향하지 않는다고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교수는 덧붙였다. "자신이 비참해진 원인은 원래 가져야 할 특권을 약자들이 무임승차해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분노와 혐오가 넘쳐흘러, 결국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 약한 곳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 94.6%, 여성 83.7%, 장애인 83.2%, 이주민 41.1%가 온라인 혐오표현으로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제 혐오는 단순한 사회현상이 아닌 극복하고 치유해야 할 사회적 병폐이다.
혐오와 차별의 반대편에는 다양성의 공존과 평등이 있다. 우리 사회가 혐오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혐오가 당사자에게만 해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혐오에 들어가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창의적 에너지로 바꾼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부와 역량이 증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혐오를 넘어서는 다양성의 공존과 평등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혐오에 대한 극복은 개인, 가정, 학교, 사회에서 다층적으로 접근하고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과제이다.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대화와 토론'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의 비극과 갈등은 대개, 아니 거의 대부분 소통의 부재에서 왔다.
가정이나 학교 혹은 국가 간에는 늘 크고 작은 긴장과 갈등은 있어왔고, 그 원인은 주로 대화와 토론의 부재였다.
현재 CBS에서 시사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정관용씨는 자신의 저서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에서 한국의 토론 문화를 이렇게 꼬집었다.
"짧은 시간에 고도 압축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그래서 토론거리는 너무도 많지만 하나하나의 쟁점마다 서로 공유하는 공감대의 폭은 좁고, 서로의 생각과 경험치의 거리는 멀고 먼 나라, 더욱이 토론에 대한 체계적 학습과 연습의 기회, 최소한 좋은 토론을 구경할 기회도 가질 수 없었던 나라. 대한민국은 토론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러면서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위해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호공존의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 둘째, 극단적인 생각보다는 포용을 추구하며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열린 마음으로 정책 중심의 토론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것, 셋째, 빨리 결론을 내리려 서두르지 말고 세심한 준비를 거쳐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가자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소통은 갈등의 조정을 넘어 아픔의 치유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수단이자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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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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