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제주 감귤

입력 2018.11.12. 16:34 수정 2018.11.12. 16:52 댓글 0개
김옥경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취재2본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맘 때면 일반 시중에서는 제주 감귤이 시판돼 봇물을 이룬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과일이지만 제주 감귤은 본래 과거에 임금에게 진상됐을 정도로 매우 귀하디 귀한 음식이었다.

감귤에 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고려 문종 때인 1052년이다. 당시 문헌에 감귤은‘탐라국의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기록해 감귤이 그 이전부터 진상품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올리는 제주도의 대표 진상품 중 하나로 손꼽혔다. 감귤 과원은 특별 관리대상일 정도였다. 제주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은 감귤이 얼마 열리지 않았는데도 나무에 달린 숫자를 파악할 정도로 감귤 수확량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특히 제주 감귤의 진헌을 위해 지난 1526년(중중 21)에 이수동 제주목사는 5개의 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했고, 이후 1530년(중종 25)에는 과원을 30개소로 확대했을 정도다.

감귤이 진상되면 임금은 감귤을 성균관과 사학 유학생들에게 나눠 주며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장려했다. 또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를 실시해 경축했다.조선조 후기 과거 시험이 많아져 급제자가 증가해 폐단이 생겼을 때도 다른 과거 시험들은 줄었지만 황감제 만큼은 계속 시행했을 만큼 감귤 진상은 의미가 컸다.

숙종 때는 담금귤 종사를 제주에 보냈는데, 그 뒤 귤나무가 열매를 맺어 목사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면 임금은 선원전에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 51년에 “제주에서 감귤을 바쳤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해 창덕궁에 나아가 천신례를 행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 감귤은 조선조 풍속도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제주 감귤은 기녀들이 과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풍악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과 헌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자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귤림상가’등이 대표적이다. 감귤이 귀한 음식이다 보니 진상에 따른 적지않은 부작용도 나타났다. 감귤이 천신이나 진상으로 바쳐지는 공식적인 용도 이외에도 제주목사를 비롯해 관리들이 사사로이 감귤을 사용하면서 중앙 재력가에게 바치는 뇌물로 쓰이거나 사적인 용도로 징수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제주 감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청와대가 제주 귤 200톤을 북한에 선물했다.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북측이 보낸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이자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에 귤을 맛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겼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한켠에서는 “북한에 조공을 보낸 것이 아니냐”는 비난 여론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 감귤이 지난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이후 민간 교류의 대표적인 품목이었던 사실을 보면 그동안 중단됐던 남북 교류의 가교 역할을 다시금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욱 크다. 김옥경 문화체육부 부장 uglykid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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