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과 조화를 버무려 발칸 최고의 뮤지션으로

입력 2018.10.19. 10:09 수정 2018.10.19. 10:20 댓글 0개
김세경의 월드뮤직
코스모폴리탄 집시 고란 브레고비치
고란 브레고비치와 에밀 쿠스투리카 감독

이 가을을 코스모폴리탄 집시 고란 브레고비치와 함께 자유를 찾아보자.

고란 브레고비치는 1950년 3월 22일 사라예보에서 태어났다.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시발지이며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명적인 전장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 최대 규모의 학살이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자행되었다.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은 희생자중 상당수가 전투 중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인종청소라는, 집단 학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가 따로 대통령을 뽑고 있으며 온전한 나라로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곳에서 고란 브레고비치가 나고 자랐다.

사라예보 전경

20세기 불행의 현장 사라예보가 길러낸 뮤지션

그러한 진통을 나라 안팎에서 겪는 동안 고란 브레고비치는 음악을 만들었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발칸 반도의 음악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철학적이면서도 유쾌하게 구사해냈다.

최고의 발칸 뮤지션이라는 칭호 앞에서 그는 겸손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발칸의 것들, 음악적인 전통 그 어떤 것들을 모아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일은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내가 자란 곳에서는 이미 그런 혼합이 존재했습니다.”

브레고비치의 음악은 발칸의 뮤지컬, 유럽식 클래식과 발칸의 리듬까지 혁신적인 방법으로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그리스, 로마니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이탈리안, 터키식의 주제들과 음악 스타일이 함께 어우러져있다.

뿐만 아니라 록, 재즈, 탱고, 모르나(Morna) 같이 동유럽의 음악적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음악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가리켜 코스모폴리탄 집시라 이름 붙였다.

발칸 음악만큼 우리에겐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찡하는 감동을 주는 음악 장르도 드물다. 발칸 음악? 고란 브레고비치? 낯설 수 있다. 그렇다면 에밀 쿠스투리카 감독을 떠올려보자.

고란 브레고비치는 에밀 쿠스투리카 감독의 집시의 시간, 아리조나 드림, 언더그라운드의 영화 음악을 담당했고 칸 영화제에서 영화 음악 감독으로 수상을 그리고 영화 여왕 마고의 배경 음악으로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듯한 리듬이 장엄한 곡조와 결합되는 것처럼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이 아주 다른 것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는 영화음악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고란브레고비치와 웨딩 앤 퓨너럴 밴드

화려한 축제같은, 그러나 울림이 있는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하면 한마디로 정신 사납다는 생각이 든다.

번쩍거리는 양복차림에 산발한 파마 머리를 하고선 대규모의 브라스 밴드와 남자 중창단, 불가리안 전통의상을 입은 가수들과 현악 사중주까지 많게는 37명까지 구성된 거대 밴드를 데리고 공연을 다닌다.

그의 공연장은 마치 축제 한마당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서 흥나는 대로 리듬을 맞추고 춤을 추고 박수 치며 다함께 축제를 즐기는 분위기가 고란 브레고비치의 콘서트장 모습이다.

16살에 ‘비옐료 두그메’(하얀 버튼)라는 록밴드를 결성했다. 16년 동안 1500만장의 앨범을 판매했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음반 판매량 및 공연 청중의 수 등 대중음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새로 수립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밴드로 군림했다.

현재는 적게는 19여명으로 구성된 구성된 ‘웨딩 앤 퓨너럴 밴드’를 이끌고 있다. 그는 그의 음악의 근원이 되는 정서적 문화적, 종교적 바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사라예보에 살 때는 모든 종교가 화합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유대인과 집시들의 결혼식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동방정교회에서 들리는 종소리로 시간을 알았고 가톨릭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 회교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가 수십, 수 백년 동안 전쟁을 벌이면서도 공생해왔던 제 고향에서 살아나온 이 음악들에는 사람들의 뿌리깊은 정서적 감동과 또 애환이 함께 느껴집니다.

집시의 시간

집시영혼을 가진 이상한 음악인

음악적 역사, 철학에 대해 애기할 때는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다. 하지만 에밀 쿠스투리카와의 작업에 대해 물었을 때는 ”그와의 우정 때문에 돈 한푼 못 받고 시작한 작업“이라고 너스레를 떨 줄 아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 집시 영혼을 가진 이상한 작곡가라 칭한다. 그의 고향에서는 음악을 한다는 것을 집시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한단다. 집시들은 음악으로 숨을 쉰다는 말이 있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2008년 6월에 4미터 높이의 체리나무에서 떨어져 허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의 모든 가족들과 팬들은 그의 음악 활동은 제쳐놓고 그가 평생 장애를 가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였다.

그런데 그의 주치의는 ”신경 손상이 전혀 없는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혔고 그는 수술 후 한달 만에 같은 해 7월 15, 16일뉴욕에서 두 번의 콘서트를 성공리에 마쳤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같은 에피소드를 봐도 고란에게 있어서 음악은 결국 집시들처럼 그를 숨쉬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시들이 지닌 예술성 존중

코스모폴리탄 집시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집시들을 골치 아프게 생각합니다.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킨다고 비난하고 회피하죠. 하지만 사실 이들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아요. 오히려 이들은 특별한 재능이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집시들로 인해 감동을 받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찰리 채플린이나 마더 테레사 엘비스 프레슬리나 장고 라인하르트도 사실 집시들이었답니다. 우리는 그들 덕분에 웃고 울고, 진한 감동을 느끼고 인류애를 배웠습니다.

집시들은 지금과는 달리 자유가 훨씬 중요했던 시절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르쳐주죠. 그리고 중력을 거스르고자 하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전 거의 모든 이들이 집시가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단지 집시들이 우리들에게 준 것들이 무엇인지 계속 알게 해주고 싶어요. 아주 작은 신호 하나라도요.“

이 이질적이고도 정신 사나운 그러나 어딘가 모를 슬픔과 애환, 공감이 느껴지는 그의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나 역시도 전생에 집시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가끔은 답답하고 그날이 그날인듯한 이 일상의 날들에서 탈출하고 싶은 유랑민의 피가 불끈 하고 끓어 오를 때 눈을 감고 그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자. 잠시 잠깐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김세경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회의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문화강의 교수로 활동했다. 월드뮤직 애호가이자 전문가로 지역방송에서 대중에게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호주에서 아트앤 인테리어 데코레이션 공부를 한후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신진작가들과 외국인 화가들을 후원하는 전시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