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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4주년]사랑방 24년, 만남을 묻고 인연을 답하다

입력 2014.11.05. 19:17 수정 2014.11.06. 09:20 댓글 0개

1990년 광주에 뿌리를 내린 사랑방신문이 스물 넷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의 애정과 관심 덕분이었다.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달려온 사랑방신문은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인연을 맺어왔다.


24년의 지난 역사를 함께해 온, 그리고 사랑방신문을 이끌어 온 주역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편집자주>

 

■ ‘탄생 동기’ 신입사원 이주희

 

 

사랑방미디어 광고마케팅센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입사 3개월 차 파릇파릇한 신입사원 이주희 씨다. 매일 아침 활기찬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겐 흔히 볼 수 없는 특별한 ‘동기’가 있다. 바로 ‘탄생 동기’ 사랑방신문이다.


사랑방미디어 임직원 가운데 유일한 1990년생인 이주희 사원은 스스로를 “사랑방에 입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홀로 광주에서 생활했던 이 사원은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카페, 빵집, 공장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던 그녀는 사랑방신문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망이 사랑방신문이었죠. 광주 곳곳에 포진한 사랑방신문 배부대 덕분에 손쉽게 신문을 구할 수 있었어요.”


여느 20대와 마찬가지로 취업난에 허덕이던 이 사원은 ‘잡사랑방’의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자소서 및 이력서 컨설팅 서비스를 받았고, 그러던 와중에 사랑방미디어에 입사까지 하게 됐다.

 
광주가 고향이 아닌 그가 광주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지역 맞춤형 정보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사랑방신문과 잡사랑방은 든든한 취업 지원군 역할을 해냈다.


한 명의 독자로서 사랑방신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던 그가 이제는 사랑방신문의 독자들을 최일선에서 만나는, 한 명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이 사원은 “사랑방신문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곳곳에서 봐오던 신문이기에 저보다 훨씬 먼저 태어났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사랑방신문’ 하면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이 우리 곁을 지켜주는 매체라는 이미지가 강했거든요.”


이주희 사원에게 사랑방신문은 어떤 존재일까?

 

“제품을 말하면 딱 떠오르는 브랜드라는 게 있잖아요. 사랑방신문은 제게 그런 존재였어요. ‘생활정보신문’ 하면 ‘사랑방신문’이요. ‘탄생 동기’라는 흔치 않은 인연으로 이어진 만큼 사랑방신문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저도 힘을 보탤 거예요.”

 

■ 17년 지기 광고주, 염해숙 교장

 

 

1996년 패션전문학교인 ‘밀라노직업전문학교’를 설립한 염해숙 교장은 이듬해인 1997년 사랑방신문과 만났다.


당시만 해도 “광고는 일간지에 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에 생활정보신문에 광고를 내는 ‘과감한 결단’을 한 것이다.


“돈을 지불한 사람만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간지와는 달리 사랑방신문은 무료 배포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죠.”


17년간 인연을 이어오면서 사랑방신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흑백만이 전부였던 신문에 화려한 컬러 광고가 등장했다. 광고를 낼 수 있는 분야는 훨씬 풍성해졌고, 신문 배부대는 더욱 촘촘해지는 등 배포시스템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염 교장은 “이제는 사랑방신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배포시스템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염 교장이 긴 세월 동안 사랑방신문과 인연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17년간 매달 만나지만 여전히 어렵기만 한, 광고마케팅센터 김영방 국장의 영향도 컸다”며 아리송한 말을 건넸다.


“김 국장처럼 예의를 갖추고 고객을 감동시키려 노력하는 직원들이 있는 회사라면 믿고 동행해도 좋다고 생각한 거죠.”


다년간 사랑방신문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그이기에 애정 어린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홍보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컬러 배치 등 더욱 예쁜 편집을 부탁한다”며 패션 전문가다운 조언을 덧붙였다.


사랑방신문의 17년 지기, 염 교장은 사랑방신문을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만날 수 있게 돕는 오작교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수요자로 공급자를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것.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의 창이 더욱 커지도록 많은 노력과 혁신 부탁합니다. 그게 바로 사랑방신문과 밀라노직업전문학교, 그리고 지역경제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이니까요.”

 

■ 생활의 모든 것을 사랑방과 함께, 장진혁 대표

 

 

 

 

광주 서구 광천동에서 컴퓨터 A/S와 전산 소모품을 납품하는 ‘열린전산’의 대표 장진혁 씨. 그는 사랑방신문과 18년째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장 대표와 사랑방신문의 첫 만남은 18년 전인 1996년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한 그가 사랑방신문 배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장 대표는 매일 새벽 4시면 오토바이를 타고 사무실에 출근해 오전 9시까지 광산구 송정동 일대 농협, KT, 예식장 등 각 단체와 기관 100여 곳에 사랑방신문을 스크랩하는 일을 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독자 반응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인터넷, 모바일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 시민들에겐 사랑방신문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기 때문일 것.


“사랑방신문은 가장 인기 있는 신문이었어요. 아르바이트, 일자리, 집 구하는 사람들까지 모두들 사랑방신문만 찾았으니까요.”


지난 2002년 장 대표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체를 열었다. 사랑방신문의 독자였고 또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그가 ‘광고주’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중고컴퓨터를 사겠다는 사람도, 팔겠다는 사람도 모두 사랑방신문을 통해 만났었죠. 광고를 내면 순천, 여수 등 전남권에서도 전화가 빗발쳤어요.”


현재 장 대표는 오프라인 기반에서 온라인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등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호명을 바꾸고 전산 소모품 납품에 주력하고 있다.


“과거 오프라인 위주의 사업방식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지기 마련이죠. 사랑방신문이 지난 몇 년간 다양한 매체를 개발하고 선보이면서 진화해왔듯이, 저도 흐름에 따라 발전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방’이 가지고 있는 가치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랑방신문과의 인연을 한 가지 이상 갖고 있을 거예요. 시민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는 사랑방신문이잖아요. 생활정보신문의 대명사가 된 사랑방신문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하지만 늘 그 자리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김누리 기자 knr8608@sarangbang.com>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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