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뉴스

[창간 22주년] 광주시민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다

입력 2012.11.05. 21:32 수정 2012.11.05. 21:42 댓글 0개
다시 보는 ‘사랑방신문 창간스토리’

“촬촬촬촬촬...”

1990년 11월6일 새벽, 고속 윤전기에서 8페이지짜리 타블로이드 신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켜켜이 쌓인 신문 사이로 ‘週刊 사랑방’이라는 제호가 선명했다. 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를 담겠다며 준비한 지 8개월 만에 광주 최초의 생활정보신문 ‘사랑방신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창간은 말 그대로 ‘어렵고 힘든 난산(難産)’이었다. ‘주간 사랑방 창간준비위원회’를 꾸리고 5개월간 전국의 모든 생활정보신문매체를 조사·분석했다. 그해 7월 광주 북구 유동 동선빌딩 4층, 10평 남짓한 공간에 사무실을 마련하면서 본격적인 창간작업에 들어갔다. 전화기 4대에 직원 10여 명이 전부였다. 


창간에 앞서 예비호를 만들어 테스트를 거쳤다. 8월에 주간 사랑방 창간 1호 홍보지를 발간하고 10월16일까지 5회에 걸쳐 창간 예비호를 발행했다. 

광주에서 처음 시도하는 ‘생활정보신문’이다 보니 모든 게 난관이었다. 창간에 참여한 모 직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눈물을 머금은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고 회상했다.  


성과도 있었다. 예비호를 만들면서 ‘정보에 목말라 하는 시민들의 요구’를 확인했다. 효율적인 인사관리, 적성에 맞는 직업선택, 부동산 및 중고 자동차의 적절한 유통, 근검절약하는 생활용품의 재활용 등 실질적적인 생활 정보에 대한 독자들의 갈망은 컸다. 생활정보제공 전문 매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현실 역시 절감했다. 


하지만 홍보가 부족했다. ‘생활정보신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무료신문이 무엇인지, 생활정보신문이 무엇인지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각 동별 지역별로 왕래가 빈번한 점포 80여 곳에 배부대를 설치했다. 일간신문의 간지를 통해 정기적으로 배포하고 아파트와 상가 등은 직접 배달하거나 우편으로 발송했다. 


시민들을 상대로 홍보와 설득작업도 계속했다. ‘시민들의 생생한 삶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열린 신문’이라는 창간 취지와 10만 부에 달하는 발행부수, 폭발적인 광고효과, 실제 독자에게 직접 배포, 전달한다는 성실함을 주로 강조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금세 나타났다. 사무실엔 격려와 문의 전화가 폭주했다. 초창기 사랑방신문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은 “일자리가 필요한 구직자, 직원이 필요한 업체, 가게를 알리고 싶은 주인, 집을 팔거나 사고 싶은 이들, 중고물품 필요한 주부 등 시민들의 생활 속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높았다”고 말했다. 


광고 효과도 뛰어났다. 광주에만 10만 부에 달하는 신문이 쏟아지다 보니 효과는 일간신문의 4~5배에 달했다. 광고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한 대기업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지금의 LG이노텍, 그때는 금성사였는데 직원을 뽑으려고 광주 최대신문인 ㄱ일보와 사랑방에 동시에 구인광고를 낸 적이 있어요. ㄱ일보 광고비는 200만 원이었고 사랑방은 25만 원이었죠. 그런데 면접 접수자를 봤더니 ㄱ일보 보고 온 구직자는 50여 명, 사랑방신문을 보고 온 구직자는 250여 명인 거예요. 그걸 보고 금성사 인사담당자가 깜짝 놀랐죠. 광고비는 싸고 효과는 훨씬 좋았으니까. 그 이후부터 금성사는 사랑방에 광고를 냈죠.”


이는 믿을 수 있는 신문을 만든다는 편집 원칙을 지키면서 신뢰를 쌓은 게 컸다. 글자 한 자, 글 한 줄에서도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구인’의 경우 회사의 상호를 반드시 밝혔다. 부동산은 실수요자간 직거래 방식을 적극 활용해, 부동산의 부정적 문제 발생을 억제하도록 했다. 


중고차와 생활용품란은 자원재활용 및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장으로 활용토록 했다. 특히 허위, 과장, 왜곡광고를 배제하고 과소비를 조장하거나 불건전한 소비광고, 지하경제를 형성하는 검은돈의 금융광고는 차단해 신뢰감을 높였다. 


사랑방신문이 광주시민의 가슴 속에 서서히 각인되면서 구인구직과 부동산, 생활물품 등 광고가 크게 늘었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매주 8페이지로 나오던 신문은 1년 만에 32면으로 늘었다. 투박하던 편집도 이듬해 전국 최초로 매킨토시와 스캐너를 도입하고 전산시스템화하면서 깔끔해졌다. 


생활 정보가 많아지고 볼거리가 늘면서 ‘광주 사랑방’엔 가속도가 붙었다. 창간한 지 1년 6개월 후 주 2회 발행했고 규모도 48면으로 증가했다. 이듬해는 일부 컬러 면으로 전환했고 타 지역으로 확장했다. 부산에 부산시대, 순천 사랑방, 군산 사랑방, 목포 사랑방 등 영호남 지역의 생활정보시장에 뛰어들었다. 


사랑방신문이 성장하면서 시민과 시민이 직접 사랑방을 통해 거래하는 다양한 ‘직거래 장터’가 형성됐다. 집과 구인, 중고차, 중고물품, 생활용품 등이 직접 거래됐다. 


진풍경도 벌어졌다. 사랑방신문이 발행되는 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회사 앞에 시민들이 장사진을 쳤다. 인쇄소에서 발행한 신문이 회사로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조금이라도 먼저 신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집을 구하려면 아침에 맨 먼저 전화를 해야 했어. 조금이라도 늦으면 다른 사람이 계약을 해버리니깐. 일자리도 마찬가지. 아침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직원이 채용돼 버리니깐 아침 일찍부터 신문구하기 전쟁이 벌어지는 거지.” 올해로 20년째 사랑방신문에 근무 중인 김모 국장의 회상이다. 


2012년 11월6일. 사랑방신문이 처음 빛을 본 지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사랑방신문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정보가 만나는 커뮤니케이션센터 역할을 맡아왔다. 


말 그대로 부동산, 취업, 자동차, 생활용품 등 생활정보는 물론 지역경제, 동네소식 등을 전하는 ‘시민들의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했다. 생활경제신문 ‘광주 사랑방’을 메인으로 생활정보포털 사랑방닷컴, 생활미디어 옐로우사랑방, 사랑방애드, 사랑방D&S, 부산시대 등을 운영하는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했다. 


어느덧 광주에서 시민과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생활필수품’이 됐다. 

박준배 기자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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