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보성 산앙정'

입력 2020.06.23. 17:44 수정 2020.06.25. 17:44 댓글 0개
높은 산을 우러러 큰 길을 걸었던 박광전
보성 산앙정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고산은 높은 산이고 경행은 큰 길이다. 높은 산을 우러러 큰 길을 간다는 뜻이다. 끝에 붙은 두 개의 지(止)는 뜻이 없는 어조사다. 높은 곳에 있어 늘 우러러 봐야하는 고산은 신(神)과 같은 존재다. 영원불변의 무엇, 경배의 대상이거나 혹은 진리일수도 있다. 여기서는 공자를 말한다. 기원전에 무(無)로 돌아간 공자를 만져볼 수는 없으므로, 십자가가 예수를 대신하듯이, 고산이 공자를 상징한다.

경행은 공자의 발자취다. 그는 떠났지만 많은 것을 남겼다. 인의예지를 요체로 하는 정신과 이념은 만고에 살아있다. 그것은 선지자로서의 첫 길이었고, 훗날 많은 사람들이 뒤따르는 큰 길을 이루었다. 다가가려고 하나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고산은 그러므로 우러르는 것이고, 다가가려고 한 만큼 다가가 있는 경행은 그러므로 행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닿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송시열이 뜻 없는 두 개의 지(止)자로, 임란의 의병장 조헌의 서당이름을 '이지당(二止堂)'으로 지어 원문의 뜻을 더욱 확연하게 한 것은 재기발랄하다. 보성의 의병장 박광전도 여기서 두 자를 가져와 1559년 대원사 들어가는 맑은 계곡 너머에 정자를 지었으니 '산앙정(山仰亭)'이다.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은 보성 조양리 태생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호는 죽천(竹川)이다. 아홉 살에 스승 홍섬(洪暹)으로부터 배운다. 훗날 영의정에 세 번 중임된 홍섬은 당시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흥양(고흥)에 유배 와 있었다. 22세에 두 번째 스승을 만나 수학하니 양응정이다. 그는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양팽손의 아들이다.

박광전은 과거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맹자가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구하는 것'이라 했듯이 나를 찾아가는 그것은 사유하는 학문이다. 그러니 입신양명을 바라는 선대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1559년 봄, 34세의 그가 문우들과 대원난야를 유람하다가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계곡 옆에 정자를 하나 짓는다. 당시 대원사 스님 30여명을 동원하여 집을 지어 올리는데 그들의 기운을 고무시키기 위해 말술(斗酒)을 대접했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우계기(遇溪記)'에 나온다.

이 우계기가 명문이다. 정자를 짓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계곡의 풍광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담겨 있다. '폭포의 물줄기가 세차게 뛰어올라 지축을 뒤흔들 듯하며, 물이 얕으면 구슬을 퉁기고 옥을 내뿜어 기다란 산비탈에 흩뿌려서…'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유려한 문장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우계에 대한 통찰이 이 글의 백미다. '만난다(遇)함은 무엇인가? 적막한 물가에서 무료할 때에 흐르는 물을 따라 걷다보면 우연히 시냇가에 이르러 뛰어난 경치를 얻게 되니, 이는 사람이 시내를 만난 것(人遇溪)이다.

처음 천지가 열려 사물이 생길 때에 이미 지형이 뛰어난 곳을 갖추어 놓았건만 광채를 감추고 숨긴 지 몇 해만에 비로소 우리들에게 발견되니, 이는 시내가 사람을 만난 것(溪遇人)이다.' 사람이 계곡을 만난 것인지, 계곡이 사람을 만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대목은 장자의 '나비의 꿈(胡蝶之夢)'을 연상케 한다. 우계기는 당대의 문장가 김창협이 "도학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문질이 이처럼 환히 빛날 수 있겠는가"라고 찬했으며, 당시 유생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이때 지은 정자가 산앙정인지 우계정인지, 혹은 산앙정과 우계정이 각각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사라졌고 훗날 후손들이 그 자리에 재건하면서 산앙정으로 이름 지은 것이 지금 내려온다. 당시 박광전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교우들과 강학하면서 유유자적 30대를 흘려보낸다.

1566년 겨울, 그의 나이 41세에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기 위해 안동으로 떠난다. 안동은 천리 길이기도 하거니와 조선시대에 40대면 노인이다. 그의 학문을 향한 발심이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가, 행장을 꾸리고 대문을 나서 먼 길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안동 도산서당에서 한 철을 난다. 이듬해 정월 귀향하는 그에게 퇴계는 "만년에 좋은 벗을 만났는데 갑자기 헤어지게 되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이별시 다섯 수를 지어 마음을 전하고 그가 편찬한 '주자서 절요' 한 질을 선물했다.

죽천은 이 책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을 묻고 스승은 답하는 서신왕래 문목(問目)이 86항에 달한다. 이 내용이 '퇴계집'에 전한다. 박광전은 1568년 증광회시에 진사 2등으로 합격했다. 이어 1571년 46세의 나이로 경기전 참봉을 맡으면서 드디어 출사한다. 헌릉 참봉을 거쳐 1581년 학문을 인정받아 왕자사부(師傅)에 제수된다. 그는 사저에 있는 임해군(7세)과 광해군(6세)을 가르쳤다. 1583년 죽천은 함열 현감에 이어 회덕 현감을 지냈다. 백성을 다친 사람 살피듯 한다는 뜻의 '시민여상(視民如傷)' 4자를 동헌에 붙여놓고 일했지만 자주 상관의 뜻을 거슬러 결국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경상의 곽재우, 충청의 조헌 등이 의병으로 나섰다. 담양에서 일어나 6천명의 의병을 모은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비보를 접한 박광전은 모병의 격문을 쓴다. 7월20일 보성관아에 700여 명이 모였다. 당시 66세의 박광전은 와병 중이어서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면서 장남 근효를 참모관으로, 차남 근제를 사병으로 출전시킨다. 고경명도 혼자 간 것이 아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참전하여 장남과 함께 순국한 것이다.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으고, 전장에 부자가 함께 나가고, 본인이 못갈 형편에는 자식들을 출전시키는 이런 모습들은 무능한 조선 왕실이 어떻게 500년을 버텨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1597년 정유재란. 왜군은 북상하다가 명군의 역습을 받고 전라도에 주둔하면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박광전은 다시 일어선다. 그의 나이 72세, "나는 병세가 완연하니 곧 죽을 것이다. 그러나 국난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출사표를 던지며 의병장으로 나선다. 그는 왜군을 무찌르고 화순 동복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니, 향년 71세. 훗날 좌승지에 추증되고 보성의 용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41세에 새로운 학문의 길을 떠나고, 66세에 의병을 모아 거병을 하고, 71세에 의병장이 되어 전장에 나서는 죽천 박광전. 그의 생은 비범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역경에서 오그라드는 것이 사람이다. 지향이 없으면 골목길을 걷는 것이고, 고산을 우러러서는 큰 길을 가는 법이다. 그는 문득 길을 떠났으며, 삶의 변곡점 마다 높은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 지향을 주저 없이 실천했다. 고산앙지 경행행지, 이 말이 그의 한 생과 잘 어울린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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