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리뷰]이보 반 호브 '로마비극', 5시간33분 체험 타임라인

입력 2019.11.10. 11:33 댓글 0개
이보 반 호브의 마법…현대적이면서 고전적인 셰익스피어
8~10일 LG아트센터
연극 '로마 비극' (사진=LG아트센터 제공)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갓, 아임 글래드 아임 낫 미(God, I'm glad I'm not me)."(밥 딜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 포크록 대부 밥 딜런(78)이 발언한 문구를 대형 스크린에 띄운 채 연극 '로마 비극'(Roman Tragedies)은 관객을 맞았다.

'내가 아니라서 기쁘다'는 지극히 딜런 다운 발언이다. 2010년 첫 내한공연 이후 8년 만인 지난해 두 번째 내한공연에서 딜런은 대표곡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마니아 관객이 아니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편곡을 해 객석을 수군거리게 만들었다.

영화 '아임 낫 데어'(감독 토드 헤인즈·2008)는 대중에 대한 딜런의 배신감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 배우 6인이 딜런을 연기했는데 딜런의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다. 상상과 추정으로 그려낸 것이다.

네덜란드 인터내셔널 씨어터 암스테르담의 예술감독인 벨기에 출신 이보 반 호브(61)의 대표 연극인 '로마비극'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어떻게 비틀었을까.

2007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초연한 뒤 12년 만에 오른 한국 무대. 셰익스피어의 세 작품 '코리올라누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엮어 만든 5시간30분짜리 대작이다. 국내 공연계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작품으로, 10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3회차 티켓은 일찌감치 마감됐다.

이 작품을 한 마디로 잘라 설명하면 '엄청나게 현대적이고 믿을 수 없게 고전적'이다. "갑옷을 달라"고 하고 수트를 입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연극은 로마시대 인물들을 현대적으로 펼쳐낸다. '코리올라누스'에서 코리올라누스에게 패한 볼스키의 장군 '툴루스 아우피디우스'를 TV 뉴스 앵커가 인터뷰 하는 등 고전 텍스트에 현대성과 시의성을 가미한다. 시대배경과 이야기 등은 원전 그대로 두고, 의상과 소품 등은 지금의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기존 인식과 다른 새로운 공연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관객들은 러닝타임 동안 자유롭게 무대와 객석을 옮겨가며 원하는 위치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공연 중 휴대폰을 이용해 무대 장면 또는 연기하는 배우들의 사진을 촬영한다거나 이를 소셜 미디어에 게재하고 실시간 공연 소감을 남기는 것도 가능하다. 또 무대 위에 바(Bar)가 마련돼 객석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관람할 수 있다.

첫날 8일 공연의 관람기, 아닌 체험기를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기존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다른 작품과 달리 3시간가량 앞당긴 이날 오후 5시3분부터 시작한 '로마비극'은 이날 오후 10시33분에 막을 내렸다.

#16:45 = 의기양양하게 객석에 앉았다. 수백번 공연을 관람했으니 공연 보는 것에서만큼은 이골이 났다고 자부했다. 5시간30분쯤이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2015년 10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1에서 공연한 로버트 윌슨의 4시간30분짜리 대작 '해변의 아인슈타인'을 미동 없이(?) 관람한 기억을 끄집어내며 마음을 다졌다.

#17:03 = '코리올라누스' 편이 시작됐다. 일단 첫 번째 무대 전환 전까지 모든 관객은 객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코리올라누스가 월계관을 받고 로마로 개선한 이후 첫 번째 장면 전환이 시작됐다.

#17:15 = 장면 전환이 시작되자마자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 중 100명가량이 무대 위로 올라간다. 공연장 내 사회자가 마이크를 통해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안내사항과 유의할 점을 전한다. 관객은 곳곳에 놓인 소파에 앉거나, 일어나 있다. 관객들은 무대 위 현대적인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인다. '코리올라누스'는 강한 자부심과 거만함으로 자멸하는 로마 장군 코리올라누스가 주인공. 그의 과격함은 배우들의 물리적인 부딪힘으로 표현된다. 관객들은 바로 코앞 배우들의 물리적 충돌과 대화를 목격한다.

#17:50 = 또 무대 전환이 생기고 무대 위로 올라가는 관객 인원수가 더 늘어난다. 관망하다 그 군중에 섞여 객석에 올라갔다. 무대 중앙 의자에 앉아 있는 배우 정동환이 눈길을 끌었다. 정동환은 2017년 3월 개별 공연 1부와 2부로 나눠 7시간 동안 공연한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출연한 적이 있다. 1인4역을 맡은 그는 특히 1부 마지막의에서 대심문관을 연기할 때 독백을 무려 20여분간 쏟아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 그가 대형 스크린 화면에 배우가 아닌 관객으로서 다른 배우들과 한 화면에 잡힐 때 흥미로웠다.

#18:29 = 또 무대 전환이 이어진다. 이번에는 극이 '줄리어스 시저'로 바뀔 차례다. 무대 전환에는 보통 5분 안팎(최대 길면 9분)의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관객들은 무대 상수(오른쪽)에 차려진 바(Bar)에서 허기를 달랜다.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공화정 시절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등이 시저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 그를 암살한 뒤 파멸하는 이야기다.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명연설을 듣기 위해서는 든든히 배를 채워야 한다. 핫도그, 샌드위치, 쿠키, 물, 커피, 주스, 컵에 든 과일 등을 먹을 수 있다. 배우 바로 옆에서 핫도그를 먹으며 그들의 연기를 보고 있으니, 특권처럼 느껴진다. 평소 공연장 안에서는 뚜껑이 있는 병에 담긴 물만 마실 수 있다. 음식을 사먹기 위한 줄이 길지 않냐고? 걱정 마시라. 무대 전환뿐 아니라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어두컴컴해진 조명 속에서도 구매가 가능하다.

#19:20 = 시저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 이날 최고로 몰입도가 높았던 장면 중 하나다.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섞여 있고, 화장실 등을 가기 위해 공연장을 드나들고 있는데 이런 집중도가 생긴다는 것이 놀라웠다. '로마비극'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인물들의 죽음이 시(詩)적으로 처리된다는 것이다. 무대 가운데 유리벽 사이에 마련된 공간에 누우면 '죽음'이 되고 그것을 경찰이 찍어 놓은 사진처럼 스크린이 띄우면 죽음이 '확정'된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인물이 살았던 시기를 자막으로 띄운다.

#19:33 = 마침내 안토니우스의 그 유명한 연설 장면이 재현된다.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 앞에서 시저를 죽인 정당함을 설파한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시저에 대한 감정적인 추도 연설은 로마 시민을 선동하고,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파들은 로마에서 쫓겨난다.

#20:15 = 마지막극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위한 무대 전환에 돌입했다. 무대 위 바(Bar)의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일부 관객은 인근의 편의점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21:00 = 크리스 니트펠트가 연기한 클레오파트라가 도드라진다. 그녀의 문란한 생활이 강렬한 팝 문화로 대변된다. 미국 록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2006년 발매한 9집 '스타디움 아카디움' 수록곡 '험프 드 범프(Hump de Bump)'. "우리가 일으키는 혼란을 믿어"라고 노래하는 이 펑키한 곡의 뮤직비디오가 스크린에 상영된다.

#21:50 = '로마비극'의 파격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시저에게 무릎 꿇은 에노바르부스가 자책감까지 내려둘 수는 없다. 번뇌에 차 있는 그는 갑자기 공연장 밖을 튀쳐나간다. 카메라가 급히 그를 좇아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공연장 안에 있는 관객에게 전달된다. LG아트센터 로비를 거쳐 건물 밖 길거리까지 나간 그는 그곳에서 울부짖는다. 영문을 모르는 거리의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실제 극을 보고 있는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를 두게 하는 이 '낯설게 하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대한민국 풍경을 녹여낸다. 결국 '로마비극'이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하는 마법을 빚어낸다.

#22:33 = 안토니우스에 이어 클레오파트라가 숨을 거둔 뒤 극이 끝났다. 꼭 5시간30분이 지나 있었다. 객석에서는 기립 박수가 쏟아진다. '로마비극'은 셰익스피어를 꼭 경건한 마음으로 관람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록페스티벌 같은 축제적 태도로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편하게 즐길 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연극의 무기 중 하나는 같은 공간에서 공동체적 경험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번거로움과 지루함을 '참아내야 한다'는 인식도 박혀 있다. 그러나 '로마비극'은 5시간30분을 쏜살같은 시간으로 만들며 고전의 뼈대를 목도하게 만든다. 무대 위에 설치된 TV 속에서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등의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데 지금 이 시대의 정치, 문화적 풍경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이처럼 다양한 은유의 정경을 만들어낸 점도 특기할 만하다. 개인 소셜미디어에서만 공유가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스마트폰으로 플래시 없이 사진·동영상 촬영이 가능한데 이는 모든 관객을 시대의 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효과도 낳는다. 다양하게 셰익스피어를 접했지만, 이런 셰익스피어는 처음이었다.

#23:00 =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그간 다른 일부 연극들을 보면서 느꼈던 불안과 우울이 잦아들었다. 연극을 통한 연대의 희망을 봤다. 그 절박했던 바람이 아직 유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극은 진화하고 있다. 초연한 지 12년 만의 '로마비극'을 보고 든 깨달음이다.

realpaper7@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