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동백을 닮은 매혹적 여인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입력 2019.10.31. 17:46 수정 2019.10.31. 17:46 댓글 0개
김세경의 월드뮤직-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 소설 뒤마 피스의 '까멜리아 레이디' 주인공의 실제모델 마리 듀프레시.

날씨가 갑자기 훅 추워졌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경칩에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다른 꽃들과 달리 이제 슬슬 동백은 꽃을 틔울 준비를 한다. 동백은 11월 말부터 꽃을 틔우기 시작해 겨우 내내 붉은 아름다움을 지키며 꼿꼿이 그 자태를 자랑하다 초봄에 만발하고 져버리는 꽃이다.

하얀 눈 속에 빨갛게 피어 오른 모습도 그렇고, 동백의 색 자체가 잎사귀 색과 함께 어우러져 꽃의 아름다움이 완벽해지도록 돕는다. 동백은 색으로 돋보인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은은한 성적 분위기를 풍겨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가들의 뮤즈로, 모티브로 사랑 받았다. 올해 대한민국 가을은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용식이와 동백이의 사랑이야기로 울고 웃고 있다. 편견과 차별에 맞서 우직하게 제 삶을 빛내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는 답답한 우리네 삶에 울컥한 감동과 소소한 웃음을 선사해주고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도 이 동백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있었다. 1848년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산드르 뒤마의 아들인 뒤마 피스는 그 당시 사교계의 꽃으로 유명했던 마리 듀프레시와의 강렬하고 짧은 사랑이야기를 소설로 남겼다. 이름하여 '까멜리아 레이디', 바로 동백꽃을 들고 있는 여인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만든 베르디.

뒤마 피스는 유명 소설가였던 아버지 알렉산르드 뒤마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 살 때까지 거리에서 자랐다. 사생아로 자신이 당해야만 했던 부조리와 차별로 사람들이 소외된 이들에게 들이대는 이중 잣대에 몸서리쳤다. 그래서였을까. 우연히 만난 프랑스 사교계의 꽃 마리 듀프레시와 사랑에 빠졌고 말리는 아버지와 의절까지 해가며 그 둘은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사치스러운 마리의 씀씀이를 감당하기에는 무명의 가난한 소설가에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남자 후원자를 만나러 다니는 마리에게 심한 비참함과 모멸감, 배신감을 느낀 뒤마는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들의 헤어짐 이후 폐병으로 마리는 죽게 된다. 후에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알게 된 뒤마 피스가 한때나마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마리 듀프레시를 기리기 위해 4주 동안 호텔에 갇혀 미친 듯이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이 동백꽃을 들고 있는 여인, '까멜리아 레이디'다.

마리는 한 달에 25일 동안은 흰 동백을, 생리를 하는 5일간은 붉은 동백을 가슴에 항상 꽂고 다녔다. 그리고 그 동백을 구애자를 선택하거나 비밀 약속을 위한 징표로 사용했다. 그런 마리의 모습을 보고 모티브를 얻은 뒤마가 책의 제목으로 동백을 선택한 것이다. 이 뒤마 피스의 소설은 희극으로 각색돼 연극으로 올려져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다. 대본가 피아베는 이 연극을 보고 감동해 대사를 쓰고 거기에 작곡가 베르디가 곡을 붙였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라 트라비아타'(길을 벗어난 여인, 방황하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전 유럽의 사랑을 받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 3대 오페라로 꼽힌다. 그 명성에 걸맞게 '라 트라비아타'는 현대에 들어서도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1948년 1월 한국서 공연되며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6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진 '라 트라비아타'.

베르디가 이 연극을 보게 된 것은 1852년 2월 파리에서였다. 당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채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불안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베르디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너무나 비슷한 두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아 이를 오페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동백꽃 여인'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새롭게 태어난 오페라는 1853년 3월 6일 베니스의 유서 깊은 극장 라 페니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갖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 공연은 참담한 실패를 기록했다.

베르디의 초연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가수의 뚱뚱한 몸매가 폐렴으로 죽어가는 가련한 여인 비올레타 발레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참패 요인이었다. 주인공 가수가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나 병세가 짙어 쓰러졌을 때, 자욱한 먼지가 무대 위를 뒤덮어 그녀 뒤 무대 배경이나 다른 출연진을 가릴 정도였다. 슬픔이 복받쳐야 하는 장면에 관객들이 배꼽을 잡고 웃어제끼는 통에 극은 완전히 웃음거리가 됐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오페라는 전설이나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경우가 대부분으로, 관람객들이 클래식한 매력을 기대하고 작품을 관람한 것도 실패 요인이었다. '라 트라비아타'는 여느 오페라와는 달리 파격적일 정도로 현실을 묘사해-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덧없음, 신분적 차별과 죽음- 관객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가 되었던 소프라노를 주인공 이미지에 어울리는 가수로 바꾸고 시대 설정을 1700년대로 옮긴 후에야 '라 트라비아타'는 전 유럽을 열광시킬 수 있었다. '라 트라비아타'는 수많은 가극들 중 3대 걸작의 하나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오페라로 자리매김했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는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어떤 곡인지 다 알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중 하나이다.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비올레타와 순진남 알프레도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그린 이 오페라가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19세기의 사교계에서는 서양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에서까지도 여자들이 가슴에 동백꽃을 꽂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다고 하니 한편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만들어낸 그 파장을 이 얼마나 대단했던가. 극 전반에 흐르는 애절하고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의 아픔, 비탄, 슬픔, 통렬함, 아름다움, 그 처절함을 전해주고 있다.

아,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인가

내 마음을 이렇게 뒤흔드는 이

사랑의 고민 속에 사로잡는 이

내 맘을 산란케 하는 이가

그이였던가, 그이였던가

상냥한 그의 음성이

사랑을 속삭이고 나를 위로했네

그대가 내 영혼 모두 빼앗아갔네

내 가슴 깊은 사랑의 궁전에

그이로 가득 찼네, 오 그대여!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중

'아! 그대였던가'의 한 대목

동백은 날씨가 추워지고 매서워지면서 더더욱 그 꽃의 자태가 아름다워진다.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비해 꽃이 질 때는 추적추적 한 잎씩 한 잎씩 떨어지지 않고 봉오리째 목이 확 잘리듯이 꺾여 죽는다. 그 죽음조차 덧없거나 지저분하지 않다. 동백의 꽃말은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사랑이 나를 아름답게 합니다'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란다. 이 가을 동백이 전해주는 이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대를 갖고 있는 당신은 그래도 행복한 겁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라 트라비아타'의 '아! 그대였던가'를 들으면서 한번 곰곰이 상념에 젖어보자. 동백의 계절을 맞아 지금, 현재 나는 당신을 빛나게 할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가!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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