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음악 향한 사랑으로 세상 밝힌 노장 트럼페터

입력 2019.10.24. 17:27 수정 2019.10.24. 17:27 댓글 0개
김세경의 월드뮤직-아르투로 산도발
아르투로 산도발은 음악을 하겠다는 열망 하나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해 형편이 어려운 음악학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자신이 경험한 모든 기회를 사회에 환원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러시아에서 공연하고 있는 산도발.

갑자기 날이 쌀쌀해진다. 이럴 때면 항상 가슴을 울리는 트럼펫 소리를 찾게 된다. 아르투로 산도발의 '콜로라투라 콘서트 포 소프라노(Coloratura concert for soprano)'는 내게 10월의 곡이다.

이 적막하고 공허한 가을밤, 산도발의 트럼펫만큼 우리의 옆구리를 채워주는 곡은 드물다. 그를 생각하다 보니 쿠바인으로서 2013년 오바마로부터 영예로운 미국인들에게 수여하는 자유 훈장을 받았을 때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인사말이 기억이 났다.

"쿠바의 빈곤함 속에서 태어나 그 정부에 의해 억압받았으며 아르투로 산도발은 이 세상과 함께 그가 가진 재능을 나누는데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빛나는 트럼페터이자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전 세계 모퉁이 모퉁이마다의 모든 팬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위대한 연주자로서 새로운 세대를 일깨워왔습니다. 그는 아직도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가장 최고의 음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니체 역시 음악이 없는 인생은 유배당한 삶이라 했다. 그런데 진실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는 자유로이 음악을 할 수 없어 유배를 당하다시피 살았지만 그의 음악 하나로 전 세계를 환히 밝힌 이가 바로 아르투로 산도발이다.

아르투로 산도발은 생존해 있는 최고의 트럼페터로서 음악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그레미상 후보로 19번 올랐으며 그 중 열 번 상을 받았다. 여섯 번의 빌보드상과 한 번의 에미상 역시 수상했다.

에미상은 배우 앤디 가르시아가 아르투로로 분한, 그의 자전적 영화인 HBO의 '리빙 하바나(For Love or Country)'의 배경음악을 작곡한 것에 대한 시상이었다. (원래 살아있는 거장에 대한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투로 산도발의 영화는 그 살아생전에 만들어질 정도로 그의 음악적 파워는 막강했다.) 가장 최근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디지 길레스피와의 만남과 그의 기억에 대한 책 '내 인생을 바꾼 그 사람'을 발표하기도 했다.

1984년 산도발의 모습.출처 Gampe

아르투로 산도발은 쿠바의 아르테미사에서 1949년 1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친척으로부터 호른을 선물 받고 호른을 불기 시작했으며 그의 나이 열두 살에는 거리 음악가로서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1973년, 이라케라 밴드가 되는 오케스타 쿠바나 드 뮤지카 모데나의 설립을 돕게 된다.

그리고 이 음악 그룹과 함께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다녔다. 1982년 그의 멘토이자 친구이자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투어를 다닐 기회를 얻게 된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산도발은 쿠바최고의 연주자로 뽑혔고 BBC와 레닌그라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에 객원 연주자로 뽑히게 됐다.

1989년 길레스피는 산도발을 UN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초대했으며, 이들과 함께 로마 공연 중 그의 쿠바에 남은 가족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발생했다. 디지 길레스피가 미국 부통령에게 부탁해 미국 대사관에 망명 요청을 하게 되고 이는 이내 받아들여졌다.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무사히 망명에 성공, 1998년에는 정식으로 미국의 시민이 된다.

산도발은 파키토 디베라, 티토 푸엔테와 치코 오파릴과 함께 마이애미와 영국, 독일 등에서 쿠반 음악 같은 라틴 음악을 함께 연주했다. 1990년에는 올스타 빅밴드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산도발은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에 거주하고 있으며 플로리다 국제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더불어 그가 재즈 앙상블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윗월쓰 대학의 객원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피츠버그 심포니,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과 전 세계를 다니면서 협연을 펼치기도 했다.

지난 2014년에는 내한공연이 예정됐다가 그의 건강문제로 무산이 됐다. 이후 국내에는 지난해 서울 재즈 페스티벌과 통영재즈페스티벌에 모습을 드러내 그의 특유의 연주실력과 유쾌한 무대매너로 한국 팬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의 젊은 시절은 '리빙 하바나'를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쿠바의 하바나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노래를 하던 인기 음악인이었던 그는 혁명정부가 들어서며 예술 문화를 억압하자, 단지 재즈 음악을 하겠다는 열망 하나로 가족들과 위험을 무릅 쓰고 망명을 감행했다.

쿠바의 혁명정부 시절 미국의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를 몰래 청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개월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타고난 음악가였던 산도발. 그는 우상으로 삼았던 디지 길레스피가 카리브 해 여행도중 쿠바에 잠깐 들리자, 음악인임을 숨기고 그에게 하바나 투어를 시켜주며 쿠바의 민속음악을 소개하겠다 자처했다. 그렇게 디지 길레스피와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에 살면서 그는 음악에만 열중했고 후에는 아르투로 산도발 인스티튜트라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했다. 음악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 중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가르쳤다.

이들에게 장학금을 증여하고 악기를 제공하기도 하며 건강보험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집안에 여유가 없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며 "자칫 음악을 영원히 하지 못했을 자신의 처지와 같은 사람이 또 생기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이같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에게 음악 활동이란 음악 자체가 동기가 되며 관객을 마주하며 연주를 할 때마다 힘을 얻는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 노장 트럼페터는 "내가 경험했던 모든 기회를 제공해 배경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환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쿠반 재즈라는 새로운 장르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고, 현존하는 트럼페터 중 가장 완벽한 기술을 구사하는 뮤지션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예술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조국을 등져야 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무엇을 사랑을 한다고 극단적으로 무엇을 버리거나 등지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우리에게 문제라면 가끔은 열심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다.

아르투로 산도발의 '소프라노를 위한 색색의 콘서트', '콜로라투라 콘서트 포 소프라노'를 들으며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그리고 소중한 것을 등지지 않아도 되는 우리들의 사랑에 감사하자. 그럼 공허한 밤이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을테니.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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