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팩션영화 신드롬에 대한 단상

입력 2017.08.02. 08:29 수정 2017.08.22. 14:41 댓글 0개
맹수진 아침시평 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팩션 열풍이 거세다. 한국영화의 대표 흥행작들을 통해 어느 정도 체감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리스트를 뽑아보니 그 무게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2003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의 흥행을 이끌어온 14편의 영화 가운데 8편이 팩션이다.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 외에 최다 관객(1700만명) 기록을 수립한 ‘명량’, 그밖에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밀정’, ‘동주’, ‘박열’, ‘군함도’ 등 수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담론을 주도해온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역사’라는 키워드를 빼놓고 한국 대중영화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할 만큼 가히 팩션의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팩트와 픽션의 합성어인 팩션은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빚어낸 대중문화물을 일컫는 용어이다.

‘역사영화’, ‘시대극’ 같은 기존의 용어를 두고 굳이 ‘팩션’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는 배경에는, ‘역사극’이라는 용어에 수반되는 충실한 고증에 대한 부담을 덜고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보고자 하는 창작자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시장에 노출되자마자 작품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을 평가하는 대중의 냉정한 눈앞에 만신창이가 되는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화려한 볼거리에 집착하지 않고 신문 같은 소품까지도 꼼꼼하게 고증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시대 젊은이들의 진심을 진정성 있게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반면, ‘덕혜옹주’나 ‘군함도’는 역사 왜곡을 넘어 날조에 가깝다는 호된 비난을 들어야 했다.

‘팩션’, ‘역사영화’, ‘시대극’이라는 이름으로 한꺼번에 호명되었지만 실제로는 저마다 다른 욕망과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한 일차적 평가의 기준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한 복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 아닌 구측된 이야기 즉 서사라는 것은 현대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역사학이 그럴진대 팩션 영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영화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지 묻기 전에 영화의 창작자들이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해 보여주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영화는 그러한 자신의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작품들의 탄생 과정에서 창작자와 자본, 관객 사이에 어떠한 교감과 소통이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에 꽤나 실망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요즘 매체에 수없이 언급되는 스크린 독과점이나 역사 왜곡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추측하건대 이 영화를 구상할 당시 감독의 심상을 지배한 원형적 이미지는 역사에 기록된 사실의 형상이 아니라 섬에서 집단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스펙타클한 액션 이미지였을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한국의 대표 액션영화 감독으로 성장한 류승완 감독에게 근래 한국영화계의 팩션 붐은 자신의 인장인 액션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배경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며, ‘군함도’라는 사건은 일차적으로 그가 애정해 마지않는 액션 장르를 위한 매력적인 배경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오프닝에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자막이 오히려 변명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평가하는 정당한 방법은 영화가 의도한 장르적 쾌감의 성취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즉 일차적으로 역사영화가 아닌 액션영화의 틀에서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영화는 문제투성이다. 무엇보다 ‘군함도’는 260억이라는 제작비를 믿기 힘들 만큼 만듦새가 투박하다. 현실의 부조리를 콕 찌르는 촌철살인의 대사, 주인공을 중심으로 거세게 몰아치는 액션의 쾌감 등 그의 모든 장점은 이 영화에서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역사 날조’라는 영화에 대한 일차원적 비난 속에서 근래 2~3년 사이에 팩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변화들, 예컨대 왜 근래 팩션 영화들은 반복적으로 일제시대를 호출하는지, 최근의 역사영화들에서 2000년대 이후 줄기차게 등장해온 좌절한 소년들이 사라지고 영웅적 캐릭터들이 복귀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등 정작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대상들이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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