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더니

예술가의 노트 엿보기, 박구환 작가

여행/공연
In full bloom
Recollection


화폭 한가득 매화가 피었습니다. 

눈이 부시게 파란 캔버스 가운데에 ‘톡 톡’ 하고 터진 붉은 꽃잎.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완만한 언덕을 따라 한참을 걸어갑니다.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뒷동산 같습니다.

박구환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갤러리 벽 앞에 서 있지만, 마음은 고향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듯합니다. 

마흔번째 개인전을 여는 박구환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담양 수북면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 자체가 여행과도 같았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목판화

"처음부터 판화를 공부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현대미술을 전공한 박구환 작가는 생계를 고민하던 20대 중반, 문화재 수복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떠납니다. 우연히 전시장에서 판화 워크샵을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동안 받았던 미술 교육의 틀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판화로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하지만, 집안에 사정이 생겨 급히 귀국한 그는 그 이후로 다시 일본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독학으로 판화 작업을 하게 되고,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며 특선, 대상을 수상하자 언론은 그를 ‘판화가’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나는 판화가가 아닌데’ 하는 생각과 여전히 삶 속에서 많은 고민들, 어려움을 겪으면서 힐링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저에게는 여행과 낚시였죠.”

바다·힐링·치유

바다낚시를 떠난 어느 날, 어김없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새벽을 맞던 때였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빛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이는 풍경, 눈앞에 거부할 수 없이 다가오는 형상들을 멍 하니 바라보는 순간, 경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한창 힐링과 뉴에이지음악, 자연, 심리 치유 등의 키워드가 급상승하던 1990년대 중후반 이었습니다. 자연이 열리는 풍경이 마치 그에겐 피아노 선율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연이  빚어낸 풍경. 자연이 드로잉 해 놓은 것을 내가 한번 캔버스에 펼쳐볼까? 이걸  판화로 표현해보자. ‘목판화’ 하면 대표적으로 민중미술이 떠오르는 때였습니다. 

전통 목판화의 강렬한 인상을 파스텔톤으로 부드럽게, 자연의 형상을 펼쳐 회화적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sea of sound’, ‘소리의 바다’ 시리즈가 탄생합니다. 화랑과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전원생활이 불러온 변화

”제가 동경하고, 그림에 담고 있는 것들은 자연의 편안함, 행복, 힐링인데 도심 속에서 그 작업들을 하다 보니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환경의 변화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담양에 온지 올해로 11년째. 50대 중반의 나이가 된 그는 이곳에 와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심신의 안정을 찾고 작품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답니다. 

작품의 배경이었던 나무를 캔버스에 꽉 들어차게 한그루만 담은 ‘만개한 나무’ 시리즈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농촌 사람들도 작품 곳곳에 나타납니다.  최근에는 ‘정미소’가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실제 정미소의 느낌을 그림에 담뿍 담아내기 위해 작년에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답사를 했는데, 온전히 그 모습을 지닌 곳을 찾기 힘들어 아쉬웠답니다.

판화야 유화야?

2013~2014년 쯤 국내 판화 시장이 침체기를 맞게 되자 박구환 작가 역시 변화를 모색합니다. “판화는 절대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압착에 의해 생기는 멋이 있습니다. 이는 절대 붓으로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론 정확히 찍혀버리기 때문에 딱딱한 느낌이 들어요. 

한 번씩 붓으로 그려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 두가지 상황이 교묘하게 맞물렸죠. 판으로 찍어낸 뒤에 물감을 올려 완성하는 기법. 판화같기도 한데 질감이 올라와 있어서 묘한 매력이 있다고들 합니다.”

많은 시간과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작업의 연속이었습니다. 2015년에 광주 리채갤러리에서 유화 작품을 선보였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후에는 서울, 부산, 대구 아트페어에서만 소개해오다, 올해 처음으로 100% 유화 작품을 가지고 김냇과에서 광주 관객들을 만나게 됩니다. 유화 작업을 거친 작품으로만 전시를 채우는 것은 1991년 첫 개인전 이후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행복을 주는 작가

그의 작품을 보러 갤러리를 찾은 많은 관객들은 그림 앞에 서서 회상합니다. 그림으로 치유받고, 공감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는 그림은 타인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제 그림이 너무 흔하고 편하기만 할 수도 있겠지만, 광범위한 예술의 역할을 제가 다 충족시켜줄 수는 없잖아요. 

저는 제가 그림 작업하며 느낀 행복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의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생까지 행복을 담뿍 실어 보낼 수 있는 그림을 그릴 겁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따뜻해집니다.

4월 5일부터 30일까지 동구 구성로 204번길 김냇과에서 박구환 작가의 개인전이 ‘회상’(回想 Recollection)을 주제로 열립니다.

여기서는 20점이 넘는 작품이 소개됩니다. 어른 키만한 높이의 캔버스에 들어찬 은행나무, 두팔을 활짝 핀 너비의 화폭에 담긴 고향 풍경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주말, 갤러리로의 힐링 여행,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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