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더니

찬바람 불 땐 따끈한 쌀국수 국물!

맛집잇포

오늘은 무척이나 춥다. 살얼음 바람이 얇은 옷을 침투해 속속들이 피부를 훑었다. 그런데도 한참을 밖에서 돌아다녀야 했던 날이었다. 그 와중에 뱃속 허기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뭔가 뜨끈한 국물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정처 없이 식당을 찾다가 김대중컨벤션센터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문득 평온하게 쌀국수를 먹는 한 남자가 그려진, 자그마한 간판과 마주쳤다. 그림이 그렇게 부럽긴 처음이었다. ‘조우’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식당의 이름은 잇포(EAT PHO)라고 했다. ‘pho’가 베트남의 쌀국수를 뜻하는 말이니 여기라면 뜨끈한 국물 가득한 쌀국수를 기대할 수 있겠다. 소소한 조명들이 식당을 감싸며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은 테라스엔 봄, 가을이면 맛있는 이야기꽃 제법 피겠다. 가게 앞으로 3대 정도는 주차할 수 있을 공간도 보인다.

평범하지만 이국적인 듯. 우아하지만 심플한 듯. 요란하지 않지만 화려한 듯. 한 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인테리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묘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루 종일 찬바람과 싸운 내 몸과 마음이 이내 평온해져갔다는 것. 간판에 그려져 있던 그 남자처럼 말이다.

사장님이 건네는 꽃무늬 메뉴판이 인상 깊다 생각했는데, 메뉴 구성은 더 인상 깊다. 쌀국수와 볶음밥, 볶음면 뿐 아니라 다양한 동남아 요리가 망라되어 있다.

지인들 여럿이 함께 와 다양하게 주문해보고 싶을 만큼, 메뉴 설명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장고 끝에 스프링롤, 잇포쌀국수, 먹물 크림 볶음면을 택했다.

본 메뉴에 앞서 배달된 스리라차 소스다. 고추, 증류 식초, 마늘, 설탕, 소금으로 몸을 채운 후 태국에서 물 건너 왔다. 본래 매운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통 태국식보단 덜 톡 쏘고 묽은 편이라 한다. 쌀국수에도 어울리지만 스프링롤의 좋은 친구다.

본격에피타이저, 스프롤(6,000원)이다. 신선한 채소와 새우를 라이스페이퍼에 말아 놓은 베트남식 요리란다. 헌데 이건 흔히 보던 스프링롤의 크기가 아니다.

반으로 잘라 개수를 늘리지 않고 눈으로 먼저 푸짐함을 느끼게 했다. 라이스페이퍼 뒤로 몸을 숨긴 새우의 붉은 빛이 이리도 영롱하다니! 얼른 집어보니 상당히 묵직하다.

통통하다 못해 고도비만스러운 새우가 여러 마리인 데다가 파프리카, 오이, 당근 등 채소도 가득 들어 있다. 노란 겨자 소스에 콕 찍어 냉큼 입에 넣어 본다. 신선한 채소의 맛에 살짝 톡 쏘는 소스가 더해져 입안은 다음 음식을 맞이한 채비를 마친다.


다음은 큼지막한 그릇에 담긴 쌀국수(9,000원). 숙주나물은 이미 면 아래로 살포시 몸을 숨긴 상태다. 하얀 쌀국수면은 외모에서부터 탱탱함이 느껴지니 섹시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 위로 얹어진 두툼한 고기. 프랜차이즈 쌀국수의 고기가 슬라이스치즈인 듯, 대패로 긁은 듯 얇은 것과 달리 무척이나 두껍다. 마지막 레몬 한 조각은 화룡점정이다.

일단 국물부터 접수해봤다.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진한 육수의 끝엔 상큼한 레몬이 있다. 아, 참 좋다. 면은 또 어찌나 탱탱한지. 쪼로록, 쪼로록 빨아들일 때마다 사라져만 가는 그들이 야속할 정도다.

두툼한 고기는 스리라차 소스에 푹 찍어 먹는다. 톡 쏘는 매운맛과 단맛이 더해지니 쌀국수 맛의 스펙트럼을 넓혀줬다.

먹물 크림 볶음면(13,000원)은 처음 보면 먹물 파스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건 분명 ‘볶음’면이다. 밍밍한 듯 아쉬운 맛이 아니라, 산뜻한 향이 입안으로 스며드는 신묘한 면이다.

페투치니스러운 두툼한 쌀국수를 젓가락 가득 집어 입에 넣으면 짐작과는 다른 맛이 펼쳐진다. 오징어 먹물의 향을 음미하며 면을 씹다 보면 담백한 마늘향이 찾아오고, 마지막엔 상큼한 레몬향이 감돈다.


한 그릇에 담긴 오징어, 새우와 같이 먹으면 식감도 맛도 풍성해진다. 그럼에도 무겁지 않다. 산뜻한 소풍 같은 맛이다. 다만 주의할 게 있다. 이와 혀와 먹물에 검게 변한다는 점. 소개팅남녀가 이걸 먹다가 서로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상상을 해보시라.

난 이렇게 우연히 찾은 맛집이 좋다. 특히나 집 근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더 자주 갈 수 있고,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런 곳은 오래 영업해야 한다.

마침 잇포는 올해 12월 1일에 오픈했단다. 아무래도, 새로운 단골집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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